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세 번이나 축복하고 네 번째는 메시야까지 예언한 발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선지자일까?  발람은 자신에 대해 ‘브올의 아들 발람, 눈을 감았던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 (엎어져도 정신만은 또렷하다는 혹은 시야는 분명하다는 의미일 듯)’ 등으로 말한다.  이 부분은 지난 3-4절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데, ‘눈을 감았던 자’는 여러 영어 번역에서 ‘눈을 뜬자’ 혹은 ‘눈을 뜨게 된 자’로 되어 있다.  즉 전에는 눈이 감겼었지만 이제는 눈을 떴다는 의미같다.  마치 Amazing Grace (나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의 ‘광명을 얻었네 (Once blind but now I see)’ 부분을 읽는 느낌이다.  지난 세월 많은 주술을 사용하여 신탁을 구했지만 자기를 죽이려던 여호와의 사신도 직접 보고 말하는 나귀를 경험하는 등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니 이제는 더 이상 눈이 먼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러한 눈을 뜬 체험이 바탕이 되었기에 그의 예언은 유효하지만 이에 대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나 인정하심은 없다.  23:3에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들어야 하지만 그들 자신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결국 발람은 마치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 (딤후 4:10)’던 것 처럼 이스라엘과 연합하지 않고 자기의 길로 간다.

17절 부터는 미래 이스라엘의 흥함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예언하는데,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라고 기록한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내가 이스라엘의 먼 미래를 바라보노라’ 고 번역했다.  즉 구약의 많은 예언처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이 예언은 토라의 네 번째 책인 민수기에 기록된다.  아직도 주님 오실 때가 한참 남았다.  다니엘의 예언에도 하나님은 ‘봉함하라 (12:4)’고 명하신다.  그런데 계시록22:10 에는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은 지난 2천 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부패한 사회의 무법천지 같은 상황 속에서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 보다는 비교적 훨씬 빠르고 효과적인 폭력이나 권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인생을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의 약속은 아직 먼 것 같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듯 하다.  하나님은 실패하셨는가..?  하지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 7천이 이 시대에도 분명있다.  예언은 멂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련과 유혹을 믿음으로 이기는 주님의 참된 백성들과 노예들이 분명 존재한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기록한다.  예언하신 미래를 현실에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소망은 인내하게 하지만 믿음은 진정 행하게 한다.

주님, 입술의 고백 뿐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바알에게, 현실에 무릎꿇지 않은 주님의 노예들을 세우소서.  주님을 만나는 이 아침에 주의 종들의 각오를 새롭게 하소서.  오직 주께만 무릎 꿇고 섬기게 하소서.  주의 약속이 더딘것 같지만 소망 안에서 그 약속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 약속을 미리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