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태어난 순서와는 별개로 장자권이 뒤바뀐 사건이 종종 목격된다. 가인과 아벨부터 첫째와 둘째가 태생 순서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성장하며 (굳이 장자권 문제가 아니더라도) , 이삭과 야곱,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리고 오늘 말씀의 야곱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 르우벤과 요셉 그리고 유다의 예이다.
제 2차 인구 조사를 시행하는 26장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열거되는데 5절은 '이스라엘의 장자는 르우벤이라'고 기록한다. 전통적인 이해라면 르우벤이 장자로 인정되지만, 후에 두 배의 몫을 받는 요셉이 이생의 장자권을 얻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유다가 참된 영적 장자권을 얻는다.
처음 태생이었음에도 장자권을 잃은 르우벤은 일반적으로 그 주된 원인이 성품의 문제라고 해석한다. 성품의 문제는 형제들 중 리더십을 잃게 하고 결국 장자권까지 잃게 하는 심각한 문제다 (창 49:3-4). 대상 5:1-2는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고 기록하는데, 이로 인해 현세의 장자의 명분은 요셉으로 넘어갔지만 후에 그리스도의 나심은 유다 지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히 7:14) 영원한 장자권은 유다 지파에 있다.
그런데 이 세명 그리고 다른 형제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굳이 성품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유다의 삶에도 며느리 다말의 예 등 문제가 많았다 (물론 율법 전이기에 죄로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롬 2:15의 기록처럼 양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삶은 우리의 상식이나 바람만으로 이루어지거나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삶 해설 제목이 '영적 성장과 쇠퇴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라고 하며 범죄에 대한 대가로 인구가 현저하게 줄은 시므온을 언급한다. 분명 죄에 대한 책임은 죄를 지은 나에게 있다. 하지만 동시에 죄에 대한 완전한 사하심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 갈 5:13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씀하는데, 이 죄사함은 우리로 완전히 자유하게 하고 이 자유함은 육체의 기회를 삼을 정도로 막강한 것이다. 마치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졌지만 '파산'이라는 절차를 통해 그에 대해 완전히 자유해진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다. 나보다 더 나아보이는 삶, 나보다 더 탁월해 보이는 영성, 나보다 더 많은 탈란트를 받은 것 같은, 나보다 더 나은 자식들이나 가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질투심 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나 역시 나의 열심이나 노력만으로 현재의 삶을 이루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 많은 것 아닌가.. 로마서 9:16은 기록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님, 장자권을 받을 자격이 없는 나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참으로 은혜를 입은 자로서 방종하지 않고 이 자유함을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는데 쓰기 원합니다.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께 기꺼이 묶이기 위해 자유합니다. 내 안에 더욱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하신 기업을 누리기 위해 생명 안에 새 사람으로 거듭나며 매일 십자가로 옛 사람이 처리되어야 함 (민 26:52-65)
신앙생활이 예정론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자유의지론인지, 믿음인지 아니면 행함인지, 공의인지 은혜인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한 자연스러운 성장인지 아니면 십자가를 지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당신이 이끄시는 것이지만, 유한한 인간에게는 우리의 책임이 따른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구원얻는 것은 분명 은혜지만,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한다. 야고보서의 여러 구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살전 1:3에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리고 살후 1:11에는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라고 기록하는데, '역사'라는 단어는 원어에서 '행함 (에르곤)'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물론 이 '행함'도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는 것 같은 멋대로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그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은 크리스천 가치관이 아니다. 믿음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함을 동반한다.
26장 후반부인 오늘 말씀은 계수된 각 지파의 수대로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게하며, (아마도 위치적인 면에서는) 제비를 뽑아 불평이 없게 해야 함을 말씀한다. 64-65장에는 이때 쯤 해서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음을 기록하는데, 1세대는 홍해를 건너며 침례를 받았음에도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이는 인간의 천연적인 삶은 반드시 처리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제 2세대는 좋은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두번째로 강을 건너기 위해 요단강 옆 모압 평지에 서 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성과 죄성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이 함께 거하게 되는데, 이 생명에 나의 의지로서 연결하여 살면 '열매를 많이 맺'지만, 우리의 죄성은 혹은 옛 사람은 그걸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그 능력으로 이루시도록 우리의 죄성은 처리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도 역사하지 못하신다. 마치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지은 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생명 나무를 지키신 것과 같다.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을 의심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생명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아직도 거만하게 버티며 매일 일어나는 나의 옛 사람,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만 한다.
주님, 가끔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지,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는지 의심이 듭니다. 나의 행함은 너무도 연약합니다. 하지만 주는 내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다만 그 생명을 살기 위해 내 옛 사람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함을 다시 봅니다. 오늘도 믿음의 행함이 이루며 주의 생명을 살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기 위해 주께서 능력으로 이루게 하심을 구합니다. 십자가를 지며, 특히 말하는 것에 재갈을 물립니다. 주님 능력으로 역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