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까지만 읽으면 마치 민수기가 끝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여호수아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민수기는 아직도 9장이나 남았고 그 후에는 신명기가 기다린다. 신명기에서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내용이 다시 많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 요즘으로 치면 소위 ‘예배’에 대한 지침인데, 오늘 말씀 역시 이에 대한 내용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의 지속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짓고 소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임의로 취해서 사람이 ‘육신이 된’ 후에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들과 관계를 지속하실 수 없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명하신다.
구약 제사의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데, 오늘 말씀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그리고 ‘상번제’ 등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제 구약 형태의 ‘제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소위 로마서 12:1의 ‘영적 예배’인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원어에 가까운 킹제임스역에서는 ‘영적 예배’가 아니라 ‘합당한 섬김 (원어 ㄹ라트레이아)’ 이라고 번역했다.
사실 우리 말 ‘예배’는 매우 헷갈리는 번역이다. 영어에는 크게 worship이라는 단어와 service 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고, 중국어도 마찬가지로 ‘예배’ 혹은 ‘사봉 (봉사)’ 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헬라어 원어에 보면 ‘프로스쿠네오’라는 단어와 ‘ㄹ라트레이아’ 라는 단어 둘이 대표적이다. 개정역에는 이 대표적인 단어 둘을 혼용했는데, 어떤 때는 ‘절하다’로 다른 곳은 ‘경배하다’로 또 다른 곳에는 ‘예배하다’ 등으로 번역했다. 특히 ‘절하다’ 와 ‘경배하다’의 원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절’이라는 말이 너무 불교색이 짙어서 였을 수도 있겠다.
개정역은 요 4:24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번역했는데,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절 (프로스쿠네오)하는 자가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혹은 참, 실제) 안에서 절해야 합니다’로 할 수 있다. 헬라어 ‘프로스쿠네오’는 ‘앞으로’를 의미하는 ‘프로스’와 ‘개’를 의미하는 ‘쿠온’의 합성어인데, 마치 개가 몸을 숙여 주인 발에 엎드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무슬림들이 모스크에서 절을 하는 것과 흡사한 모습의 말이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 ‘예배’ 중에는 아무도 무릎을 꿇어 ‘경배’하지 않는다. 찬양 가사가 ‘무릎꿇어 경배합니다’ 라고 해도 이를 진짜 따라하는 이들은 없다. 과거 ‘예배당’에 의자가 없이 그냥 바닥만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엎드려 기도하기도 하고 정말 무릎꿇고 찬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현대식으로 모든 것이 편하게 짜여진 ‘예배당’에서는 이런 의식이 사라졌다. 천주교에는 아직도 장의자에 무릎꿇는 판이 따로 설치되어 예배 의식 (ritual, liturgy) 중간 중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게 했다.
교회는 발전되는 것이고 의전 역시 발전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굳이 따라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 외의 것들을 따라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프로스쿠네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리고 몸 가짐이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이해한다면 ‘무릎꿇는’ 예배는 회복되어야 한다.
신약에서 소위 ‘주일 예배’를 ‘예배 (프로스쿠네오)’라고 표현한 곳은 찾기 힘든데 (적어도 나는 찾지 못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고전 11:18, 14:26 등)’ 이라는 표현을 쓰지, ‘너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에’ 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오늘 말씀에서 매일 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안식일과 초하루 등등에 제사를 드리는 것 처럼, 예배는 주일만이 아니라 매일 행해져야 하며, 구약에서 성막이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우리의 몸이 성전이고 성전이 있는 곳이 성지가 되므로 어느 곳에서나 행해져야 하는 것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일 때 예배의 삶을 ‘나누는’ 것이다.
아침에 운전하면서 내 앞으로 십자가를 그었다. 오늘 하루 삶이 예배가 되기를 바라며, 또 나의 부족한 점을 기억하며..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십자가를 내 앞, 즉 ‘세상’에 대해 긋고 있었다. 천주교인들이 소위 ‘성호’를 긋는 것을 보면 ‘자신’ 즉 오른손 손가락을 모아 머리에서 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긋는 것을 목격하는데, 나는 내 ‘자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긋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드라큘라라도 되는 것 처럼! 십자가가 향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 프로스쿠네오이고, 내 몸을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합당한 섬김이다.
주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가지고 가야 할 유일한 참된 제물은 주님 자신이심을 압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살며 매 순간 우리의 몸이 주님 앞에 산 제물로 바쳐지기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섬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 살라지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부어졌던 바울처럼 우리의 삶에도 정상적인, 그리고 평범하게 조차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 가운데 주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삶 살게 하소서. 예배의 삶, 순간 순간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절하는 삶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