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는 상위법이 있어서 비슷한 상황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이에 대한 적용을 받는다. 살인죄가 적용 되지 않는 정당방위 처럼 ‘예외’도 있지만 법 중에는 헌법이 가장 상위법이기 때문에 그 이하 법률, 조례, 규칙, 관례 등은 헌법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은 은혜로서 모든 법 위에 군림한다.
오늘 말씀은 전쟁에 승리하여 어마어마한 전리품과 포로들과 함께 귀환하는 군인들에 대해 모세가 노하는 장면을 기록한다. 승전 기념으로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더욱 상식적이어야 했던 것은 과거 2만 4천명이 역병으로 심판받은 원인이었던 미디안 여자들에 대해서는 살려서 데려오지 말고 죽여야 했던 점이다. 아마도 음행을 했던 자들 중에도 다행히 살아 남은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들은 이방여인들과 달콤한 쾌락의 시간을 잊지 못했기에 살려 두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방 여자들은 그 자체가 이국적 (exotic) 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매력있어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들이 올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고, 창세기 부터 이방여자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입장이었으며, 모세의 율법 역시 가난안 땅의 여자 취하는 것을 금했다 (출 34:16). 이러한 상식은 그들을 살려 두지 말아야 하는 상위 개념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방여자’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모세는 남자는 어려도 모두 죽이고 (아마도 추후 복수의 원인이 될지 모르기에) 남자를 아는 (남자와 성적 경험이 있는) 여자들은 모두 죽이지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어린 여자 아이들은 ‘너희를 위해’ 살려 두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아들은 ‘이방여자’가 아닌 것일까? 아마도 ‘혈통’보다는 ‘종교성’ 혹은 ‘이념’ 등에 더 관점을 둔 것 같다. 여자 아이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성장하면 이스라엘 문화를 배울 것이고 결국은 이스라엘 여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를 요즘에는 적용하기 힘들 것 같다. 더 이상 여자들은 남자들의 소유물도 아니고 전통 가정의 질서가 거의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했지만 이에 대해 실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내일 구절인 40, 46, 47절에는 아직도 ‘사람’이 일만 육천 명이 남아서 (아마도 노예로) 군인들과 지파들 간에 나눈다. 더우기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26절에는 ‘… 탈취한 노획물 즉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라고 하시는데, 여기의 ‘사람’은 ‘아담’으로 ‘남자’를 의미한다. 아직도 남자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모세에 의하면 전멸당해야 했던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살아남았다. 은혜다. 물론 패전의 참혹을 목격한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었겠지만 그들은 살아남아 이스라엘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 합류하지 않고 자기 길로 갔던 발람은 죽임을 당했지만, 이스라엘과 전쟁에 진 이방인 다수는 오히려 살아남아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했다. 자의적이지 않기에 더욱 은혜로 보인다.
이스라엘 군인들과 더불어 이들 포로들은 7일 동안 정결 의식을 거쳐야 했는데 (19절), 셋째 날과 일곱째 날 두 번에 걸쳐 철저히 깨끗케함을 받고 진영에 합류한다. 전리품에 대해서도 불로 지지거나 녹일 수 있는 것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소독’을 했고, 물에 씻을 수 있는 것은 물로 씻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부정한 것들과 이방 백성들은 정결함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주님, 제가 주의 은혜에 사로잡혔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나의 천연적 연결들, 조상의 저주들, 천연적인 기질들이 주의 은혜로 모두 십자가에서 끊기고 죽임을 당했음을 선포합니다. 이제 주의 말씀으로 정결케 하소서. 물과 불은 깨끗하게 못하지만 주의 피는 온전히 정결케 함을 믿습니다. 사로잡혔던 나를 사로잡으시고 주님의 공동체를 섬길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