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과 갓 자손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현재 목축할 만한 땅에 머무르기를 구한다. 요단강을 건너면 싸움이 시작될 것을 그들은 알았다. 상황이 이제 먹고 살만하니 싸우기 싫다는 것 같이 들린다. 자신들을 낮추어 ‘종’이라고까지 부르며 요구한다. 모세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다들 싸우러 가는데 그들은 오히려 형제들을 낙담하게 한다고 반대했다. 그들로 인해 여호와께서 모두를 망하게 하실거라 말한다. (하지만 내일 말씀에 그들은 후에 함께 싸울 것을 결의하고 결국 그 땅에 남았으며 나중에는 므낫세 지파까지 반으로 나뉘어 요단 동편에 거하게 된다.)
생명의 삶은 ‘언약 공동체’라는 말을 갑자기 쓰는데, 정말이지 중요한 말이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혈육 기반 공동체로 보였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을 본래 기반으로 한다. 어제 ‘나눔 공동체’ 그리고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썼었지만, 나눔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는 언약이 먼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라도 갈리고 싸운다. 언약에서 떠나니 후에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린 것을 본다.
무엇이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까? ‘우리는 하나다’라는 개념, 즉 공동체 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보통 ‘사랑으로 하나되자’ 라는 말을 듣는데, 당연하고 좋게 들리지만 그만큼 애매한 것도 없다. ‘사랑 안에 하나되는’ 성경 구절들도 적지 않고 모두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이해하거나 체험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성령 안에서 (혹은 영 안에서)’ 라는 말씀 역시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이라 믿지만, 이것 역시 보이지 않는 면이라서 현실적으로 그 기준을 정하기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 않는 이러한 것을 ‘믿는’ 믿음이 공동체 의식을 이루는 첫번째 사항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보이는 면의 실행이 요구되며, 또한 실행은 그 보이지 않는 믿음의 결과 혹은 증명이 된다. 그래서 이렇게 보이지 않는 ‘믿음’을 ‘고취’시키는 것은 실행적인 면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연약한 몸 혹은 육신이 있고 이 육신이 생활하는 시공간이 있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내가 있는 곳에서 공동체는 시작된다. 나의 가까운 혈육부터 시작되고 내 이웃과 더불어 세워진다. 21세기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공간은 좁아졌고, 이제는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할 수 있다. 소위 ‘우주적인 교회’가 더 쉽게 이해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함께 더불어 먹을 수 있는 이들로 시작되며 공동체적 삶은 유지된다고 믿는다.
주님, 상황이 좋아져서 현실에 안주하든지 미래를 지향하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 주신 언약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세상 공동체와는 다른 것은 인간의 논리나 이념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주의 언약과 이 언약을 매일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언약을 붙듦으로 이러한 하나됨을 살며 함께 먹을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소서. 주의 교회가 종교단체의 모습을 넘어 함께 먹고 함께 싸울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오늘도 세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