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핵심은 요 3:16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가 있고 '믿음'이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만이 복음일까? 만일 이것만이 복음이라면 다른 성경은 필요없고 단지 윗 구절만 있으면 된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물론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땅에 들어가는 순간 전쟁이 시작될 것을 알았다. 홍해에 비해 요단강은 폭도 좁고 얕기 때문에 도강에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우선 강을 건너기만 하면 싸움은 시작된다. 도강은 전쟁을 위함이다. 분명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인되신 그 주권으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법적으로 온전히 그들 것이지만 그 땅에는 이미 강한 일곱 족속이 살고 있다. 그들을 쫓아 내는 것은 백성들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전염병이나 타민족에 의해 그들을 처리하실 수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어진 좋은 땅을 위한 쟁취 혹은 침노가 (마 11:12)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말씀하시면서 부정적인 면도 많이 언급하셨다.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할 것,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마리아의 향유를 깨뜨린 것을 말함으로 그녀의 행한 것을 기념할 것, 복음으로 인해 가정 불화가 생기게 될 것,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죽일 수도 있을 것 등..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공짜로 모든 것을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은 소요리 문답 1과 1문 처럼 하나님 당신 자신을 누리게 하는 것에 있고, 이를 더 깊이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더욱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싸움은 반드시 필요하다. 복음을 단지 '들었다'고 우리가 변화되지는 않는다. 변화는 싸움으로 내몰리고 그 가운데 주님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 안으로 공급하심을 입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롬 12:2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는데,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에는 환경적 요인도 큰 몫을 하며 특히 고난이나 영적 전쟁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12장 전체는 싸움의 여러면을 보여주고, 마지막 21절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한다.
소위 '4영리' 등 여러 전도용 소책자가 미흡하고 아쉬운 것은 복음에 대해 달콤한 내용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영적 싸움이나 자아를 부인하는 것, 복음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나 가족 간에 불화가 올 수 있다는 것 혹은 나의 생각과 계획 등은 모두 내려 놓게 될 것 등 여러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혹자는 아무리 성경에 그런 말씀들이 있다 해도 만일 그러한 부정적인 것을 전도지에 포함하면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내가 오래 전에 이랬었다) 복음은 우선 제대로 된 양면 모두를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오직 한 길 예수님만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이해나 양해를 구할 여지가 없다. 복음은 능력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들은 아무리 부정적인 면을 말해도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르우벤과 갓 자손의 요구가 허락된 이유는 그들 역시 공동체의 일부로서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가족 모두를 이끌고 가는 타 지파들보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이 비운 사이에 타민족이 쳐들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배려와 가축들에 대한 고려, 그리고 싸우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모든 재산이나 가족을 '내려놓고' 갈 수 있음을 약속했다.
주님, 성경은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냥 이대로 있게 하지 않으심을 압니다. 복음은 그 누구에게도 열려있지만 복음을 들으면 싸움에 대한 선택은 우리에게 있음을 압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을 뒤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그 가치를 깊이 알게 하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해 옥합을 깬 마리아와 같이 행하게 하소서. 이러한 것이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것을 압니다. 더 깊이 역사해 주시고, 더 많이 변화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