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제와 같이 계속해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 (1절)’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Life is a journey라는 말도 있듯이 ‘노정’이라는 단어는 영역본에서는 journey라고 번역됐는데, 이 단어는 ‘여로’ 즉 여행길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여러 곳을 거친 것 처럼 한 사람의 삶 역시 많은 과정을 거치는 여로이다.
어려서부터 한 목적을 가지고 매진하여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공을 살려 일하는 사람도 적고, 더우기 미국에서는 평생에 걸쳐 평균 10번 일자리를 바꾼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한 각 stages (NIV 1절)가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도 있고 방황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더우기 어떨 때는 전에 있던 '원점'으로 되돌아오기도 하며 삶을 사는데, 신앙인들의 영적 삶도 이와 비슷하게 보인다.
오늘 말씀에는 아론이 죽는다. 이제 곧 모세도 죽을 것이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자신이 좋은 땅에 들어가지도, 백성을 인도하지도 못한다. 대신 히브리어 ‘예수’를 의미하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좋은 땅으로 인도하는데, 좋은 땅으로 들어가서 할 것은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는 것이다 (52-53절). 즉 40년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는 주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목적은 좋은 땅에 들어가서 할 것을 구비하기 위함이다.
좋은 땅에 들어가는 것을 ‘천당’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여 장례식 때 ‘요단강 건너리’라는 찬송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좋은 땅에 들어가는 것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한 과정일 뿐이다. 구원의 시작은 처음에는 안식 (불기둥과 구름기둥)과 공급함 (만나)을 받지만 곧 싸움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그 싸움은 악한 영을 대적해서 싸우는 것도 있지만 이러한 면은 교회로서 함께 싸우는 면이 많고 (에베소서 6장의 영적 전쟁은 복수의 독자 즉 교회에게 명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부분은 나 자신과의 싸움, 세상에 대한 싸움, 죄와 싸움이다 (딤전 6:12).
베드로 전서 1:9은 ‘믿음의 결국 곧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씀하는데, ‘믿음의 결국’이라고 해서 앞으로 미래에 받을 것 같이 들리지만 ‘받다’의 동사는 현재 이태형 동사이다. 앞 8절의 모든 동사는 현재 진행형이고 능동태인데 (기뻐하다는 이태동사), ‘혼의 구원’은 우리 자신이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만도 아니라 (잘못하면 이단으로? ㅎㅎ)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은혜로 (엡 2:8) 이루는 것이기에 이태형 동사가 쓰였다. 그런데 믿음의 결국 즉 완성 혹은 끝이 ‘혼의 구원’인데 마치 현재 우리의 모든 성품이 온전해졌다고 하는 것 같이 들린다. 이것은 8절이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있다. 지금도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나 믿고 있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고 있다’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구성을 영혼육 셋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이분법으로 영과 육만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셋 모두를 말한다 (살전 5:23). 영과 육만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아마도 죄를 지음으로 영과 혼이 혼잡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구원파의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영의 구원, 혼의 구원, 그리고 육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동일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보통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영이 구원받은 것이고, 살면서 우리의 기질이 변하는 것을 혼의 구원, 그리고 마지막 나팔 소리에 몸이 변화되는 것을 육의 구원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성경은 또 그렇게만 말하지는 않는다. 고전 5:5는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데, 오히려 영의 구원이 나중에 온다. 벧전 1:9는 ‘혼의 구원’에 대해 ‘결국’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지금' 받고 있는 현재 진행형으로 설명한다. 결국 구원의 문제는 삼분법 혹은 이분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전인격적인 문제다. 이러한 전인격적인 구원은 삶이라는 여로를 통해 경험된다.
여로의 목적은 구원이고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각 지점 (stage)을 통과함으로 이스라엘은 더욱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산다. 옛 사람이 죽어나가고 새 사람으로 옷 입혀지며 혼이 구원받고 있다. 결국 완전히 이방민족을 내가 받은 좋은 땅에서 밀어낼 때까지 싸울 힘을 얻는다.
주님, 믿음 조차도 주님 주시는 것임을 압니다. 삶의 여러 거점을 지나면서 더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주님을 닮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소서. 주와 동행하는 것이 갈등과 고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광이 가득한 기쁨’임을 알고 그 기쁨을 오늘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