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은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곳으로 정했는데, 누구든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들이 보복을 피해 가까운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게 마련된 장치다. 그래서 도피성은 보복하는 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요새화 되어 있었을 것이다.

도피성은 살인 문제에 국한되어있고 그리로 피할 수 있는 자격은 살인의 고의성 유무에 따른 것인데, 28절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피한 후 대제사장이 죽은 후 나오면 피를 보복하는 자는 더 이상 그를 손댈 수 없다. 그래서 도피성은 마치 감옥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는 보호를 위해 있다.

어느 미국 초등학교에서 운동장을 둘러싼 울타리가 감옥같은 느낌을 준다고 행정부에서 학부모회와 함께 철거를 했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자유를 만끽하리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꾸 운동장 중앙으로만 모여 좁은 공간만 사용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공을 차도 울타리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고, 외부의 위험한 요소에서도 보호를 받았지만, 울타리가 제거된 후에는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울타리가 자유를 억압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막이었다.

주님 주신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믿는 이들도 술 담배를 즐길 수 있다고 보는데, 한국은 술문화가 잘못되어 큰 문제지만, 주초 자체가 신앙의 지표라고 여기는 것은 맞지 않는다. 형제 중에 술 담배를 한다고 무시한다면 그는 율법 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술에 인박이고 담배에 쩌들어 사는 것 역시 신앙인의 삶은 결코 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이러한 것은 절제하게 된다. 이는 자신에 대한 보호의 문제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보호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의 도피성이 되시는데, 직접 누구를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마음으로 누구를 매우 미워하거나 실족을 바라거나 낙태에 연류되는 것 등은 엄연히 살인죄에 해당된다. 그리스도를 믿었음에도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출구는 찾을 수 없다. 다시 주님께 나아가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고, 뻔뻔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기 위해 도피성이신 주님께로 피할 필요가 있다. 어떨 때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감옥같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울타리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더우기 부지중에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고의적인 다툼과 미움과 살인을 품었던 것 조차도 주님은 용서하셨다. 충분한 기간동안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말씀의 울타리가 나를 지키신다.

You are my hiding place

You always fill my heart with songs of deliverance

Whenever I am afraid I will trust in You

주님, 주님 안에 숨습니다. 나의 많은 부끄러운 행위와 마음과 생각 속의 추함과 어리석음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천번 만번 죽임 당했어야 했지만 주님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구약과 같이 멀리 있는 도피성을 찾아 달려가지 않아도 됨을 감사합니다. 주님께로 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