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 자체가 녹록하지 않지만, 신앙 생활은 많은 부분에서 나 자신의 바람이나 뜻을 굴복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분명 나의 원함이 있고, 또 나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 보다는 다른 것에 가 있을 때가 많지만,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것을 말씀한다 ( 6:11).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제도 이 문제 때문에 힘들었지만 오늘 말씀에서 길을 찾는다)

다윗은 먼저 1절에서 하나님을 부른다.  그리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갈급함이 나에게 있는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와 동행한다면 분명 갈급함은 채워지겠지만, 순간 순간 주의 임재를 잃을 때가 많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곧 여러 방법으로 주님은 갈급함을 나에게 주신다.  생명수이신 주님을 떠나면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28:20)’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시지 않지만 여러 상황 속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 같고, 계시더라도 사람들은 그 임재하심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상황이 힘들어지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도전한다. (나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계시지만 마치 안계신 것 처럼 묵묵하고 계시는 것 같아 힘들고, 또 분명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다른 이들의 성화에 낙망하고 낙심한다.

이때 다윗은 자신을 2인칭으로 대한다.

얼마나 2인칭 즉 ‘너’에 대해서는 비판질을 잘 하는가.  하지만 ‘나’에 대한 비판과 반성과 회개, 그리고 충고는 쉽지 않다.  이럴 때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나’를 ‘너’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은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말하는데, ‘내 혼’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에게 ‘네가’ 또 ‘너는’ 이라고 말한다.  그럼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여전히 내가 나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나 자신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이다.

큐티를 나누면서 나누는 대상이 나에게서 남으로 갈 때가 너무도 많다.  하지만 큐티는 나누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에 대한 돌아봄이고 권유이고 함양이며 선포다. 

재미있는 것은 5절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선포를 했음에도 다시 6절부터는 실패와 낙심이 온다.  믿음 생활이 항상 승리만 있지는 않다.  하지만 결국 11절에는 다시 동일한 선포를 한다.  히브리 시의 특색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실패와 성공, 그리고 높낮이를 경험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선포해야 함을 보여준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것이지만, 가끔 나 자신을 ‘너’로 다루며 선포하는 기도, 명하는 기도가 필요함을 본다.

주님, 이 아침에 새로운 깨달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단순히 ‘여기라’가 쉽게 적용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선포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정신차려라!’ ‘낙심하지 말아라!  ‘이전 일은 지나갔고 보아라 새 것이 되었다!  주님, 주님을 갈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