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일 (2절)’이 있고 ‘그날 (11절)’이 있다. 심판을 말씀하지만 또한 회복의 소망도 있다.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 (2절)’이고,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3절)’ 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날이 언제냐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날은 없던 것 같다. 그래서 ‘말일’이나 ‘그날’은 애매한 ‘언젠가쯤’으로 들릴수도 있다. 더우기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1)’는 말씀은 ‘여호와의 산’ 즉 장소 보다는 그 예배할 ‘때’가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이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솔선해서 몰려와 가르침을 구하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고전 1:21)’ 이루어진다. 이 ‘전도’는 ‘선포’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사 52:7, 롬 10:15)’ 다는 것이다.
‘00교회’라는 간판만 걸면 모두 앞다투어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 말고도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요즘은 너무도 많다. 이럴 때 일수록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이것은 단지 교회 건물에 사람들을 초청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 14:2)’는 주님 말씀처럼, 우주적인 교회라는 관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주적인 교회는 각 지역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선교도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밟는 산은 여호와의 산이되고, 하나님의 전 (아버지 집)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주님, 주의 종들에게 능력과 생명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입을 주소서. 사람의 지혜나 논리나 설득보다는 주의 은혜가 전달되게 하소서. 복음이 정말 좋은 소식될 수 있도록 오늘이 이 ‘말일’ 혹은 ‘그날’ 되게 하소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임을 선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