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1-2절은 개정역은 좀 헷갈려서 킹제임스 역으로 보자면:
이제 내가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에게 노래하리니, 그의 포도원에 관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심히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가졌도다. 그가 땅을 파며 거기에서 돌을 주워 내고 최상품 포도나무를 심으며 그 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그 안에 포도즙틀도 만들었도다. 그가 포도가 열리기를 바랐더니 야생 포도가 열렸도다. 로 되어 있다.
헷갈리는 이유는 여기에서 '내'가 누구인지, 이사야 자신인지 아니면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대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정역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킹제임스를 읽으면 이사야 자신 같다. 하지만 3절 부터는 이 '내'가 다시 하나님으로 들린다.
1절의 '내가'가 이사야로 이해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이라고 하기 때문인데, 이 '포도원'은 7절에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씀한다. 즉 1절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의 '내가'는 7절의 '만군의 여호와'이다. 포도원의 소유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는 누구일까? 이 단어는 성경에 단 한번 여기에 기록된 단어다. 이사야에게는 '나의 사랑하는 자' 여호와도 계시지만,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도 있다. 만일 이 둘이 같은 분이라면 그냥 '그'라고 했겠지만 (물론 시적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반복'일 수도 있지만), 이 둘은 다른 분이기에 (하지만 동시에 같은 분) 다르게 기록했다. 여기에서 다윗의 고백이 생각난다. 다윗은 시 110:1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라고 고백하는데, 여호와가 계시고 '내 주'가 계신다. 이 '내 주'는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시다 (마 22:45).
오늘 말씀 구절만 보면 1절은 기쁜 노래로 들리지만 그 외는 심판이고 절망적인 내용이다. 너무도 좋은 땅에 포도원을 만들고 극상품으로 보이는 포도나무를 심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포도나무'는 단수다. 포도원에 나무 하나 만을 심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왠지 몰라도 이 농부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는다. 하지만 그 포도나무가 낸 것은 극상품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 즉 먹을 수 없는 기준에 못미치는 포도를 맺었다.
주님께서는 요 15:1에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신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포도원을 소유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아들 하나님은 극상품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실망하게 하는 이스라엘 야곱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시며 살려주는 영이신 '참포도나무'시다.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남으로 주님께 접붙힘을 받고 붙어 있으면 그 생명을 공급받아 자라며 열매를 많이 맺는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그 인격을 앙망하고 주님께 붙어있기 원합니다. 정말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늘 나의 노래 되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