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 답게 이사야 여러 부분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7장 말씀은 많이 헷갈리는데, 우선 생명의 삶 해설은 임마누엘은 메시야를 예언하는 것으로, 그리고 18절 부터는 유다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했다. 임마누엘은 분명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신약은 해석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메시야 보다는 지난 이사야 기록을 바탕으로 주께서 함께 하심을 재확인하며, 태어난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이미 1절 ‘두 왕’에 대한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는 것 같다.
10절은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는데, 정황으로 보아 여호와께서 직접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 같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며 징조를 구하지 않지만 믿음이 좋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미신같아 보이는) 신앙보다는 상황을 파악하여 계산하는 ‘상식’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13-16절은 이사야가 답답해서 대신 말해준다. 그 내용은 믿지 않는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들어쓰심으로 ‘두 왕’ 즉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멸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후에 벌어지는 자세한 내용은 조금 복잡하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다. 다만 결론적으로 앗수르 제국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
17절은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고 했는데, 원어를 그대로 보자면 ‘여호와께서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난 날부터 오지 않은 날들을 오게 하실 것이다 곧 앗수르 왕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이 유다를 떠나 분리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한 것인데, 결국 성전이 없던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성소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됨을 파괴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조금 헷갈리는데, 18절부터 계속 나오는 ‘그 날’은 이미 ‘두 왕’이 멸망당한 후이기 때문이다. 즉 믿지 않는 아하스를 주님의 은혜로 건져주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믿지 않자 결국은 남유다 역시 멸망당한다. (지도를 참조하면 동쪽에서 시작한 앗수르 제국은 사마리아 땅과 그 유역인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남유다 그리고 애굽까지 아우르는 제국이 된다.)
20절 부터는 내용이 어떤 면으로는 좋게 들릴 수 있지만, 결국 포도나무 즉 농사를 지어 풍성히 먹던 좋은 때는 끝나고 목축업을 겨우 하게 되지만 다른 것은 없고 젖 (더우기 엉긴 젖)과 채집하는 꿀만 먹을 수 있고 ‘화살과 활’ 즉 수렵으로 목숨을 이어갈 것을 말씀한다.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진리’를 말씀하지만,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도 역시 경고의 말씀은 가득하다. 분명 은혜는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하고, 주님께서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고 육을 추구하며 믿음에 관해 ‘파선’한다면 그 받을 심판은 자명하다. 은혜가 주어진 것은 우리가 받을만해서가 아니라 결코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은혜가 되었다.
주님,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왕국과 주님의 의를 추구하도록 이끄소서. 세상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삶에 대한 염려는 할 필요가 없지만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10)’은 필요함을 압니다. 다만 주님을 더 의지하기를 배우기 원합니다. 주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저를 더 내어 드리게 하소서. 주를 따르는 주의 백성들에게 오늘도 징조를 보이셔서 나아갈 바를 밝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