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이 더워지고 밤에 잠을 설치는데, 학교들이 이제 모두 개학해서 교통 체증도 심해져서 통근길에 짜증이 난다. 출퇴근 길에 듣는 러시아어 강좌도 오늘 아침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가 멍하다. 에어컨디션이 잘 되어 있는 사무실인데도 몸에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적외선이 빌딩까지 뚫고 들어오는가 보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언어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외우는 것이 꽤 도움이 되는데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예를 들어 중국어를 배울 때는 이미 알고 있는 한국어 중 한자로 된 것들에 대해 발음을 조금 바꾸면 중국어 발음이 된다. 거기에는 어떤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성’은 우리 말에는 없기 때문에 따로 외워야 한다). 러시아어 같이 꽤 판이한 언어를 배울 때 역시 영어나 헬라어 알파벳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소위 ‘연상법칙’을 적용하면 좋은데, 예를 들어 ‘의사’를 의미하는 Brach는 발음이 ‘브로치’ 비슷해서 의사 가운에 브로치를 달은 그림을 연상한다. (물론 러시아 B는 발음이 v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경우이다. 이런 때는 그냥 마음을 열고 받아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그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여러 곳에서 논리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은 내용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이 또한 다른 의미로 인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논리’를 중시하는 서구적 조직신학과 연관이 있을 수 있는데, 조직신학은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항상 모든 성경 말씀이 그렇게 논리정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문제점의 이유 중 하나가 원래 성경에는 장절 구분이 없었지만 (유대인 성경은 아직도 장절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후에 편집을 하면서 장절이 생겨났는데, 그러다 보니 같은 장은 전체적으로 같은 내용과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기대하여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완전히 달리지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지난 6장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확실히 구분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같은 장도 더 자세한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래서 서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문맥 전체를 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문맥 전체를 항상 연결해서 볼 수 없을 경우 역시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9장 말씀 역시 어제 범위 7절까지와 오늘 범위로 나눌 수 있는데, 7절까지는 소망의 말씀이지만 다시 8절 (혹은 9절)부터는 심판의 말씀이다.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마음을 열고 받으면 된다. 마음을 열면 그 심판의 말씀조차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자녀들 혹은 돌보는 형제 자매들이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성장이 보이지 않을 때, 책망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권유하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기대하는 만큼 성숙함을 보이지 않으면 낙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권유가 필요한 것은 어제 말씀 ‘여호와의 열심’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손을 놔버리고 기도만 해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믿지만, 그래도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권유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이 여호와의 열심은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 ‘진노’로도 나타나는 이 열심은 우리를 향한 계속되는 관심과 사랑이다. 나 자신을 봐도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열심은 과연 사실이다.
그래서 심판의 말씀 조차 은혜로 다가온다. 결국 이렇게 거역하는 백성과 세대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너를 위해, 그리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위해 주님을 죽임을 당하셨다.
주님, 주의 말씀 앞에 마음을 엽니다. 말씀은 영이고, 이 문자가 내게 영으로 부딪히기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며, 이해하기 쉽지 않고 상충되는 것 같아 보이는 것들 조차 합해서 은혜로 체험되기 원합니다. 나의 어떠함을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께서 그 영으로 나를 온전히 변화시켜 주시고 다시 은혜 아래 있는 저를 발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