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겸손이 자신을 낮추는 것 만은 아니다.  성경적인 교만 혹은 겸손의 기준은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렸다.  하나님을 떠나서, 그 분과의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겉으로 보이는 나의 겸손 역시 내 안의 선과 악으로 뒤엉킨 슬픈 실존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자존심의 뒷면이 열등감인 것 처럼, 다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드러날 기회가 오지 않은 것 뿐이지, 인간의 천연적인 겸손은 뒤에 숨긴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앗수르 왕은 드러내놓고 교만을 떨었는데, 그가 왕이라는 것과 더불어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은 그로 자신을 높일만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인정받지도 못한다.  앗수르 왕처럼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왕처럼 산다.  모든 결정을 자신의 판단하에 하고 자신의 안목에 좋은 것을 추구한다.  모든 생각에 ‘내가’가 있지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심판을 받는데, 그 모든 소유와 영광은 물론이고 그의 몸과 혼까지 소멸된다 (18, 원어에는 몸과 혼이 있음).  즉 모두 불에 탄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은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혼’은 죽일 수 없다.  (이걸 보면 ‘혼’은 다만 ‘의식’의 개념을 넘어 몸이 죽어도 존속하는 어떤 것이고, 그래서 부활 때 완전히 새로운 몸을 입지만 주님 안에서 변화된 혼은 자신의 삶을 기억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몸과 혼 모두를 멸하실 수 있다.  이러한 경외가 우리로 겸손하게 한다.

5:29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는데, 교만한 자 즉 천연적인 사람은 결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만 비로소 그의 삶이 주님 앞에 인정받는다.  주님을 떠나서는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성취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 15:5).

주님, 거듭난 자로 살게 하소서.  이 교만의 문제는 저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거룩하게 하셔야 거룩할 수 있는 것 처럼, 주님께서 저를 겸손하게 하셔야 참으로 겸손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어떠함을 주님 앞에 감출 수 없음을 압니다.  남을 무식하다 (stupid) 말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제 자신을 세우고 드러내고 영광 취하기를 원하는 저의 어떠함에서 구원받아, 다만 시간 마다 주님을 인정하기를 연습합니다.  제 자신을 주님께 열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