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전에는 별로 관심없던 1절에 눈길이 간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지만 매우 초라해 보이는 이름이다. 신약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주님의 족보를 기록한 세 구절과 행 13:22의 ‘이새의 아들 다윗’ 그리고 롬 15:12의 ‘이새의 뿌리’ 즉 오늘 말씀을 메시야로 풀이한 것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농부였고 더우기 아들 다윗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역기능 가정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었다.
마태복음 1장 주님의 계보는 ‘열 네대’로 나누어 놓았는데 오늘 몇번을 읽고 세어 보아도 정확히 열 네 명씩 세 부분이 아니라 다윗의 이름은 첫번과 두번째 리스트에 중복된 것을 발견했다. ‘다윗까지 십사 대요, (또) 다윗으로부터’ 라고 되어 있고, 그래서 42명이 아니라 41명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다윗이라는 인물의 중요성, 그리고 메시야는 성경 여러 곳에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언된 것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절과 10절은 이새를 언급하고, 또 바울은 10절을 인용하며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언한다. 원어를 보면 1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 그의 뿌리들로부터 한 가지’로, 10절은 ‘이새의 한 뿌리가 설 것이다’로 되어있다. 1절과 10절의 인물은 동일인물일까? 그리고 ‘그 날’은 같은 날일까? 그런데 몇몇 구절은 주님의 초림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주님의 재림 때에 임할 완벽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등장에 이용될 수도 있는 말씀이다.
아무튼 ‘이새’를 두 번이나 언급한 이유는 이름 없는 농부가 세대를 가르는 위대한 왕을 낳았던 것 처럼, 소망이 없는 상황 중에도 회복과 부흥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에 따른 언약을 알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단지 소망을 주는 내용이겠지만, 700년이 지나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신 후에는 이제 주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시간적으로 1절은 이새의 ‘후손’을 말하지만 10절은 그의 ‘뿌리’ 즉 근본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해 매우 ‘낮게’ 오셨지만 그 근본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하신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의 본체 (빌 2:6)’시다.
주님, 제 자신을 보면 다윗의 모습 보다는 이새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망없는 인간에게 구원이 되시고, 이 인생의 앞과 뒤를 관통하며 메시야 그리스도 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