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관계를 애증관계라고 한다.  어떻게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면서 증오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할 수 있을만큼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면서 풍부하다.  가히 선과 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은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애증관계는 가족 같이 가까운 사람들 간에 보통 경험되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방에게까지 미치는 애증관계를 느낀다.

19장 첫 부분은 애굽에 대한 경고를 말씀 하시다가 이제 후반에는 소위 '세상을 대표'하던 그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한 기둥이 있을 것을 말씀한다 (19).  20절 역시 애굽 백성들이 그 압자제 밑에서 고통하다 그들의 신이 아닌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어 그들을 건지실 것이다.  결국 애굽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인데,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열정과 식지 않으시는 심판과 경고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축복은 애굽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에게까지 미치는데, 당시 주요국이던 세 나라 간에 애증은 물론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한 애증 역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애굽과 앗수르 역시 하나님을 경배하며 (23), 그들 셋은 세계 중에 복이된다 (24).  더 나아가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아니라, 이제 다시 ‘이스라엘’로 회복된다.

주님, 애증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타락한 죄성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음을 봅니다.  죄는 미워하시는 주님이시지만, 우리에 대한 사랑은 한량없으시고 그 경계 또한 없음을 봅니다.  애굽같은 나의 마음 속에 주의 제단을 세우시고 그 변경에 기둥을 박으소서.  가족들 간에 또 여러 관계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모든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이 결국에는 복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