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그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중압감은 가질 수 있지만 어쩌면 책임감에서는 자유할 수도 있다.  단지 ‘도구’로서만 쓰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말씀에 능력이 없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경고를 하며 벗은 채로 삼년을 살았은데, 관심가는 부분은 적어도 본문 내용을 토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삼 년’ 동안 벗고 있으라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벗고 살며 그 경고의 임박성을 몸소 보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만 들었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3절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고 기록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채로 살고 난 후에 이 말씀을 하셨지 이사야에게 미리 ‘너는 3년만 참으면 된다’ 라고 하지 않으신 것 같다.  이사야 입장에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을, 그 끝이 언제일지 기약도 모르고 지켜야 했었다.

종종 믿음 생활에 시험이 오는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인 끝은 알지만).  시편 6:3과 또 그 외 여러 부분에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라고 묻는다.  믿음 생활 역시 ‘주여 언제까지 입니까?’ 라는 질문을 종종하게 된다.  하지만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이기에 우리가 알 바 아니다 ( 1:7).  다만 순종한 후에 주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 처럼 ‘나의 종 00이가 삼 년 동안 충성했다’ 라고 인정 하신다.

이러한 충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 없이는 견딜 수 없고 특히 위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6절은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고 하는데, 해변 주민 즉 유다 민족들이 애굽이 앗수르에 끌려 가는 것을 보고 자신들에 미칠 재앙을 미리 보며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형적으로 앗수르가 애굽을 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을 거치거나 먼저 쳐야 하는데, 본문 내용을 보아 유다를 치기 전에 애굽을 멸망시켰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역사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겠지만 이 부분에서 소망을 본다.  이사야는 본국도 아니고 애굽과 구스의 멸망에 대해 삼 년 동안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살았지만 그 관심은 ‘이 해변 주민’에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주님, 믿음과 소망은 뗄 수 없는 것을 봅니다.  믿음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의 소망 역시 주님이십니다.  기약을 알 수 없는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시고 말씀하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 되시기 기도합니다.  믿음의 삶의 본을 보이기 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을 사는 것이 많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찬양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