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패전 후 차세대에게 패전국의 후손이라는 짐을 덜어주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 교과서에는 자신들의 과오는 최소화하고 대신 원폭 같은 피해에 대한 기록은 확대했다. 이러한 노력이 통했는지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상처를 딛고 급부상했다. 반면 독일은 자신의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나치에 대한 비판을 역사에 계속 기록하면서 반세기가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 역시 전쟁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해서 유럽의 강자가 되었다. 역사에 대해 판이한 태도를 보인 둘 중에 과연 누가 옳은지는 자명하다.

1985년에 미국에 이민왔을 때 TV 를 통해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Feel good about yourself’ 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이러한 문구가 왜 광고마다 나오는지, 과연 이러한 것이 가능한지 머리 속에 항상 의문이었다. 이민 초기 사는 것이 힘든 가운데 과연 내 자신에 대해 feel good 할 수 있는지, 삶이 힘든 다른 이들도 단지 자신에 대해 feel good 하면 문제가 해결 되는지, 이것이 현실적으로 도무지 가능한지 궁금했다. 한면으로는 성경적일 수도 있겠다는 이 문구는 또 한면으로는 매우 허무하게 들렸다. 마치 레이건 행정에서 마약에 대해 ‘Just say no’라는 말 처럼…

이사야서를 비롯해서 많은 선지서에는 왜 이리도 부정적인 기록이 많을까? 일본 방식 대로라면 ‘밝은 미래’를 위해 좀 더 긍정적인 것들을 기록해야 했을 것이다. 오늘 말씀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에 더불어 이스라엘을 치는 열방에 대한 심판을 기록한다. 마치 하나님은 단지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계속되는 기록을 통해 각인될 수도 있는 문제다. 더우기 이사야서의 기록은 단지 당시의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2,7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낭독되는 것인데, 이렇게 지속적으로 읽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1절은 ‘아리엘’이라는 말과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는 것을 기록하는데, 생명의 삶 해설에는 이것을 ‘제사’ 혹은 ‘예배’로 설명한다. ‘아리엘’이라는 말은 ‘암사자’라는 의미와 ‘하나님의 화로’ 즉 제단을 의미하는 발음이 같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이 맞다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더우기 해마다 절기마다 계속되는 제사와 예배를 위한 민족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은 ‘슬프게’ 되었다. 절기는 시간적으로 해마다 돌아오지만 현실에서 절기를 절기답게 할 수 있는 여력을 잃었다.

주님께서는 요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그에게 절하는 이들은 영과 현실 안에서 반드시 절하고 있어야 한다 (원어 참조)’ 라고 말씀하셨다. 보통 ‘진리’로 번역된 ‘알레떼이아’는 ‘참’ 혹은 ‘실재’ 혹은 ‘현실’이라는 의미가 있다.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실재이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 역시 현실이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지나간다. 과거 심판 받은 이스라엘은 현실이었지만 이제는 기록을 통해 우리 현재 실재에 거울이 된다. 하나님은 이 시간적 현실에 머무시는 육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알레떼이아 시고 또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영 안에 있어야 하고 실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된다.

주님,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오늘도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게 하시고, 오늘 현실을 살면서 영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영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육 안에서 혹은 감정 안에서 주님을 만나려는 시도는 헛된 것임을 압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