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선교사를 파송할 때 인용되는 이사야서 6장 8절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라는 구절은 뒤에 오는 9-13절 내용을 보면 사실은 복음 즉 ‘좋은 소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오늘 말씀 1절도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라고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과 보응이다. 귀를 기울여 들으라고 해서 들었더니 좋은 내용이 아니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심판이 복음이 될 수 있을까? 심판보다는 용서와 치유와 부흥이 복음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심판은 복음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다. 죄로 찌들은 세상과 나의 죄성에 대해 질질 끌거나 그 죄 가운데 영원히 산다면 저주이겠지만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생명 나무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심을 기록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은 참으로 복음이다. 더 이상 죄 안에, 저주 아래 있지 않고 그 모든 부정적인 것을 끝내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처음 하신 말씀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새로운 왕국, 새로운 시스템이 도래하니 마음과 생각과 태도를 돌이키고 새로운 시스템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 죄성을 바탕으로 아담의 아들 에녹의 이름 아래 건설된 도성 (창 4), 즉 현재 익숙한 시스템이 아니라 (그것이 민주주의건 혹은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간에) 그러한 인본주의 적인 것을 끝내는 하늘에 속한 왕국이 왔음을 선포하신 것이고, 더우기 ‘이 세상 임금이 쫓겨’ 날 것 (요 12:31)과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 (요 16:11)’을 분명히 하신다. 이러한 심판이 없다면 복음이 실재적이 될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17절에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리라’고 기록하신 것인데, 하나님을 거역한 에돔땅은 심판을 받아 들짐승들이 차지하는 황폐한 곳이 된다. 그런데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분배 받은 것 처럼, 이런 들짐승들도 땅을 여호와께 분배받는데, 그냥 다른 선한 민족들이 이주해서 살 수도 있는 문제지만 소위 ‘부정한 짐승들’이 사는 곳으로 전락한다. 심판의 궁극적인 결말은 ‘불못 (계 20)’인데, 거기에는 심판 받은 모든 존재들 즉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거짓 선지자, 마귀, 사망, 음부 등 모든 부정한 것들이 영원히 태워지는 곳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고 복음이다.
주님, 주의 심판이 있음을 찬양합니다. 그 무서운 심판에서 저희를 건지시고, 우리는 주의 은혜 아래 있는 자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주의 심판의 말씀도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의 죄성을 심판하시고 드러내시며 도말하소서. 가인의 아들 에녹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을 만들었지만, 같은 이름의 셋의 후손 에녹은 여호와와 함께 300년을 걸었음을 봅니다. 말로만 크리스천이 아니라 주님을 따름으로 심판을 면하기 원합니다. 우리 안으로 더 깊이 역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