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 혹은 거기에 영향을 받은 불교에서는 ‘카르마’ 혹은 ‘업보’라는 개념이 있어서 각 사람이 소위 ‘전생’에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해 현세의 어려움이 있다고 여기며, 이것은 영원히 돌고 도는 것으로 보는데, 이러한 업에서 벗어나는 것 혹은 해방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이 생겨난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나름 해석해 보려는 몸부림으로, 삶 속에서 돌고 도는 악행과 그에 대한 보응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시작된 주변국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계속 지역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에 가까워지면서 오늘 말씀 2:4은 드디어 유다에 대한 경고가 임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 나라에 대해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한 두가지 밖에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계속 각 나라에 ‘서너 가지’라고 말씀한다.  이것의 이유를 묵상해보니 어제 말씀 1:11에는 에돔이 칼을 들고 자기 형제를 해한 것을 말씀하는데, 오늘 2:1은 이러한 악행을 한 에돔에 대해 모압 역시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서너 가지’ 죄는 단지 하나 혹은 두 가지 직접 행한 죄 외에도 이렇게 돌고 도는 죄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필요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과는 모두 끝나고 그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벽 같이 아직도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 처럼 느끼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용서하심 같이 내가 남들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작은 것에 대해 분개하고 나의 기준으로 남들을 판단하며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면 얼마나 억울해 하는가…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다른 주변국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악행’에 대한 경고와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유다에 대해서는 ‘율법’을 말씀하신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들에 대한 기준과 기대는 주변국을 훨씬 능가한다.  말씀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이렇게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서 벗어날 때 유다 역시 ‘서너 가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주님,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미 모든 죄과를 짊어지시고 그 정죄함을 끊으셨고, 대가를 지불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어떠함 가지고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지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되고 능력됨을 믿습니다.  주의 용서하심을 더욱 묵상함으로 서로 더욱 용납하며 용서하도록 더욱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