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으로 된 매우 짧은 서신이지만 이 편지가 성경에 포함된 것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서신에 대해 5-6 가지의 관점이 존재할 수 있는데, 먼저 이 편지를 쓴 바울의 관점, 그리고 수신자 빌레몬의 관점, 주제가 되는 오네시모의 관점,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교회의 관점, 또 이들에 대한 세상의 관점, 나아가 이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이 모든 관점에 대해 나누기는 어렵기 때문에 오늘 수신자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읽어본다.
빌레몬은 성경에 단 한번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가 당시 기독교계의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가정교회 (2절)’를 인도했던 인물로서, 아마도 일반 그리스도인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던 걸로 보아 비교적 부유했던 것 정도겠다.
그런데 당시 이방 교회들에 대해 아버지격인 바울은 이름 없는 이 한 형제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앞으로 말하게 될 오네시모에 대한 언급을 위해 빌레몬의 마음을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 그를 동역자 또 ‘형제(7절)’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방을 위해 택함받은 대단한 사도인 바울이 별로 존재감이 없던 빌레몬을 자신의 동역자로 당당히 인정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역의 경중은 없기 때문이다.
4-7절은 마치 빌레몬이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 처럼 들리게 하지만, 정작 이 편지를 읽었던 빌레몬은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 같다. 진정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조그마한 섬김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다만 황송할 따름이다. 바울은 빌레몬의 이러한 믿음과 그 신앙의 삶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바탕으로 그에게 지금 편지를 쓰는 이유에 대해 ‘명령’할 수도 있지만 (8절)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한다고 말한다 (9절).
바울은 이 서신에서 세 번이나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7절의 ‘마음’ 12절의 ‘심복’ 그리고 20절의 ‘마음’으로 번역된 ‘스플락크논’이라는 단어로 원래 뜻은 ‘창자’이다. 바울은 자신의 연로함도 언급하며 애끓는 심정으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고, 이러한 편지를 지금 빌레몬은 읽고 있다. 교회 안에 이 ’관계 (코이노니아, 6절)’에 대한 문제는 진정 ‘애끓는’ 심각한 문제임을 밝히고 있다.
드디어 10절에서 바울은 9절까지의 긴 서론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9절에서도 또 10절에서도 ‘간구 (파라클레오)’한다고 한다. 이 단어는 성령 ‘보혜사’와 같은 단어이고, 매우 정중한 말이며 애타는 말이다. 이 애타는 주제가 바로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에 관한 것인데, ‘오네시모’는 ‘유익한, 쓸모있는’ 등을 의미하는 말로 마치 우리의 ‘마당쇠’라는 이름 처럼 당시 노예들 중 흔한 이름이었다. 아마도 빌레몬의 다른 종들 중에도 같은 이름이 더 있었을지 모르고, 옆 집의 종 역시 같은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름은 예사로운 이름이 아니다. ‘전에는 무익하던 (11절)’ 더우기 ‘빚을 졌’을지 모르는, 즉 자세히는 밝히지 않지만 아마도 돈을 떼먹고 도망했던 인물일 수 있다.
그러한 인물이 바울을 만났는데 ‘감옥’에서 만났다. 빌레몬은 심정이 복잡했을 것 같다. ‘이 놈이 도망가더니 결국 감옥에 들어갔군’ 그런데 바울을 만나 회심하고 더우기 바울은 그를 자신이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어디로도 도망할 수 없는 감옥이라는 환경에서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직접 일대일 훈련을 받는다… (흠.. 부럽다)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 예전에는 그가 빌레몬에게 ‘무익 (아크레스톤)’ 했지만 이제는 바울은 물론이고 빌레몬에게도 ‘유익 (유크레스톤)’한 인물로 변화했음을 말한다. 사람이 변했다! 도무지 쓸모 없던 놈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를 바울은 빌레몬에게 돌려 보낸다고 한다. 이 편지를 오네시모가 직접 전달했는지, 아니면 후에 그에게 돌아갔는지 모르겠지만, 빌레몬은 이 대목에서 ‘헉!’ 하지 않았을까?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 괴롭혔던 인물 오네시모, 그가 다시 온다 (혹은 왔다).. 더우기 바울은 그를 자신의 ‘창자’ 혹은 ‘애’라고 하며 애정이 가득한 형제임을 말한다. 빌레몬은 마음이 어땠을까..?
바울은 이제 변해서 바울과 동역할 만한 성장을 이룬 오네시모를 그 옆에 두고 싶었지만 아직 그는 법적으로 빌레몬의 종이었고 그 소유권은 빌레몬에게 있었다. 하나님이 쓰시는 거라고 원 소유주인 빌레몬을 무시하고 바울 마음대로 그를 쓰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읽으며 빌레몬은 정작 변화된 사람은 오네시모였고, 자신은 오히려 더 변화되야함을 느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서신이 빌레몬에게 전달되는 것임에도 바울은 단지 빌레몬 뿐만 아니라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에게도 보낸다. 오네시모에 대한 부탁은 아마도 은밀하게 부탁해야 하는 것일 수 있지만 바울은 압비아와 아킵보를 포함시킴으로 이 문제는 빌레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처음부터 리마인드 하는 것 같다. 이 편지를 읽은 빌레몬은 처음부터 무슨 얘기인데 이렇게 거창하게 바울이 말씀하시나 라고 의문이 들었겠지만 이내 그 이유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놓인 문제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주님, 주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요 동역자임을 압니다. 전에 나에게 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을 주님께서 만져 주시고 변화시켜 주소서. 하지만 정작 변화가 필요한 이는 제 자신임을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고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변화가 이리도 느립니다. 주 앞에서 그 누구도 쓸모 없는 이가 없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한 유익한 이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 안에서 참 교제 되시고 그럼으로 우리가 참으로 사랑을 입은 빌레몬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