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교인들 간에 편을 갈라 다툼이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민망한데, 그 이유가 그리 거창하지 않을 뿐더러, 성경적인 이유를 들어 싸우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 어떤 숨은 이해 관계 때문인 것을 볼 때가 많다 (결국 자존심 아니면 돈 때문이다 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심히들 ‘소명’을 가지고 싸운다...  따지고 보면 정말 민망한 것은 그렇게 싸우다 갈려서 서로 안 볼 것 처럼 하지만,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결국에는 ‘천국’에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15절에 바울은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라고 말하는데, 이 한 구절이 그리스도인 사이의 뗄 수 없는 영원한 관계를 말한다.

육신의 가족은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영적인 가족은 영원을 함께 할 사람들이다.  육신의 가족 모두가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영원한 영적인 가족이 되면 제일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도 있지만 이 말씀이 자동적으로 한 가족이 모두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고, 더우기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들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안에 이미 가족된 이들 사이의 관계 회복은 필수적이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하면,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 그리고 빌레몬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에서 볼 수 있다.  16절은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고 기록하는데, 전에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종으로 여기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둘 것을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빌레몬’이라는 이름의 뜻이 ‘키스하는 자’인데, ‘형제 사랑’을 뜻하는 ‘필레오’와 연관된 이름이다.  즉 ‘사랑받는 형제’인데, 바울은 여기에 더 나아가 오네시모를 ‘아가페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로 둘 것을 부탁한다.  바울은 ‘빌레몬 너는 형제의 사랑을 받는, 또 사랑을 주는 사람이지?  그러면 오네시모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여겨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17절에 계속해서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라고 말하는데, ‘동역자’는 ‘코이노논’으로 1절과 24절의 동역자 ‘수네르고 (함께 일함)’와는 다른 단어다.  이 단어는 ‘일’ 보다는 ‘관계’ 즉 ‘코이노스’ 혹은 ‘코이노니아’와 관련된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형제와 그 수고에 차이가 없고 경중이 없듯이, 특히 관계 속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다.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바울은 빌레몬 역시 자신과 하나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적인 이유 중 하나는 위와 같이 ‘아가페’와 ‘생명’ 그리고 그에 따른 ‘교제’의 문제이기 때문인데, 바울은 18절과 19절에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  바로 ‘빚’이다.  성경에서 ‘빚’이라는 단어 ‘오뻬일레마’는 대부분 ‘죄’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데, 대표적으로 마 6:12의 주님 가르치신 기도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죄’가 바로 이 ‘빚’이다.  즉 우리가 남이나 하나님을 대적해서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다.  이 ‘빚’은 갚아야 하는데, 근본적인 타락의 빚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기에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해결된다.  하지만 관계상의 빚은 우리가 힘써 갚아야 하는 어떤 것이 된다.

바울은 롬 1:14에서 그의 사역에 대해서는 ‘빚진 자’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우리가 빚진 자 ( 8:12)’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이방인들 또한 ‘빚진 자 ( 15:27)’임을 말씀한다.  그런데 20절은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라고 하는데, ‘기쁨’이라는 단어는 ‘오니네미’로 ‘오네시모’와 관계있는 단어다.  바울은 일부러 이 단어를 쓰며 빌레몬에게 ‘너에게는 오네시모가 있지만, 사실 너는 나의 오네시모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나에게 셈을 해라, 내가 갚겠다.  하지만 넌 나에게 영적으로 진 빚이 있지?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복음의 빚을 진 자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빚을 서로 탕감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 (20)’을 누린다.

 

21절은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고 기록하는데, 정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부담 팍팍 되는 말씀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빌레몬이 정말 ‘더 행’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빌레몬은 정말 영 안에서 부유한 은혜를 사는 사람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후에 에베소 혹은 골로새 등 넓은 지역의 감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한낱 노예에 불과했던 인물, 특히 ‘과거’가 있던 인물이 회심한 것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을 섬기는 감독까지 되었다.  만일 바울이 자신의 사역만을 위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지 않았다면 오네시모는 그냥 이름 없는 조그만 사역을 감당하고 끝났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중요하겠지만, 바울은 그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고, 빌레몬은 그에게 ‘더 행’했다.  이러한 용납과 순중과 사랑과 함양은 한 ‘쓸모 없는 인간’을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 3:12)’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는 공간적으로 함께 했기 때문에 문안 상 처음 나오지만, 바로 다음에 ‘마가’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 ( 15:39)’게 한 장본인이다.  바울은 이 마가를 언급하며, ‘빌레몬, 나의 형제여, 나도 전에는 사역을 위해서 절대적이고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마가를 용납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역 보다는 ‘동역’이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어.  너도 오네시모를 이처럼 이해하면 좋겠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중에 바울은 딤후 4:11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25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데, ‘너희’ 즉 복수를 말하면서 ‘영’은 단수로 기록한다.  즉 ‘너희들의 영들’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들의 영’이라고 한다.  이 서신은 빌레몬에게 보낸 것이지만, 2절 처럼 압비아와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 즉 복수의 사람들을 수신자에 포함한다.  그런데 이들의 영은 단수, 즉 ‘하나’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키며 더우기 그 이상이고, 이것은 셋인 하나님께서 한분인 것 처럼, 복수의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이 하루에 ‘영원’을 사는 이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주님, 바울을 통해, 또 빌레몬을 통해 아름다운 용납과 용서와 관계의 회복이 이루었음을 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 가운데 깨어지고 상처받고 서로 멀리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 안에서 빚 진 자들임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서로 용납하게 하소서.  이 시대에도 바울과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세워지기 원합니다.  내가 섬기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러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