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광풍은 우리를 인도한다. 오히려 제대로 인도한다. 그 인도하는 곳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광풍의 요인이 우리의 고집이나 무지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미친바람’도 쓰신다. 요한복음 6장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된 ‘큰 바람’ 중에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으신 기적을 언급하는데, 21절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기록한다. 요한은 ‘그들이 가려던 땅’이라고 묘사하며 주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실 때 우리 인생은 진정한 목적지에 이를 것을 증언한다. 광풍이 없다면 우리의 맘대로 삶을 살겠지만, 광풍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의탁할 때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심을 경험한다.
흥미롭게도 28장 1절은 바울을 포함 이백칠십육 명이 도착한 곳이 멜리데라는 섬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오래 광풍이 대작했다면 중간에 파선했거나 아니면 동북풍에 의해 훨씬 더 멀리 스페인이나 아프리카로 갈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탈리아 반도 밑에 위치한 섬에 도착한다. 어떻게 보면 광풍이 그들의 목적지로 인도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는데, 이 ‘구원’이라는 단어는 31, 34, 43, 44절에 나오지만 (원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에 해당하는 단어는 31절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부분과 34절 ‘..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 부분에 나온다. 43절과 44절에 나오는 단어는 ‘διασῴζω’로 ‘구조’를 의미하지만 벧전 3:20에 노아의 홍수 때 여덟이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데도 쓰였다. 보통 ‘구원’은 영적인 면을 의미하지만 삶 속에서 어려움 가운데서 건짐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러한 경험은 주님을 믿음으로 받는 근본적인 구원을 예표해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을까? 그들은 주님을 영접했을까? 기록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물 가운데 건짐을 받는 것은 전통적으로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27장 앞 부분에서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구해주실 것을 전했다고 그들에게 말했고, 35-36절은 ‘바울은 이 말을 하고서 모든 사람 앞에서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음식을 먹었습니다 (쉬운 성경)’ 라고 기록한다. 개정역은 36절을 ‘받아 먹으니’라고 번역해서 마치 성만찬 같이 묘사했는데, 어쩌면 어떤 의미로 성만찬이었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41절에 배가 파선한다는 것이다. 이미 바울은 파선을 예언했지만, 굳이 배가 깨어질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배를 깨셨는데, 배가 깨지지 않았다면 나중에 보수해서 다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배를 타야한다. 우리의 삶은 잘 다듬어서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회개함으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라는 배는 두 물결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 힘으로 결국 파선할 것이다.
주님, 세상은 멋져 보이지만 결국 파선할 것을 압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 (벧후 3:7)’을 압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하셔서 살리는 영을 더 관심하게 하소서. 세계 여러 곳에서 지금도 부숴져 가는 수 없이 많은 배들이 있음을 봅니다. 기독교 역시 주님을 따르지 않고 맘몬을 구할 때 세상의 큰 두 물결 사이에 깨어져 갈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봅니다. 우리 안에 회개를 통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의 목적이 다시 주님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광풍으로 밀어 넣으소서. 우리가 사실 광풍 가운데 있음을 보게 하소서.
페북 나눔:
때때로 광풍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오히려 제대로 인도하는데, 그 인도하는 곳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28장 1절은 그들이 도착한 곳이 멀리 다른 곳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밑에 위치한 섬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광풍이 그들의 목적지로 인도한 것이고 그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 광풍의 요인이 우리의 고집이나 무지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미친바람’도 쓰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41절에 배가 파선한다는 것인데, 이미 바울은 이에 대해 예언했지만, 굳이 배가 깨어질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배를 깨셨는데, 배가 깨지지 않았다면 나중에 보수해서 다시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배를 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잘 다듬어서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회개함으로 갈아 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배는 두 물결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 힘으로 결국 파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시 주님을 따르기 보다 맘몬을 추구할 때 세상의 큰 두 물결 속에 깨어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회개를 통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목적이 다시 주님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광풍으로 밀어 넣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광풍 가운데 있습니다. (행 27:2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