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에 없던 멜리데라는 섬에 닿는다.  2절에는 '원주민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원어로άρβαρος' 즉 영어의 barbarian 야만인을 말한다.  이 말이 원래 정말 '야만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문화가 상대적으로 떨어진, 특히 헬라말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쓰는 단어였다.  그래서 바울은 롬 1:4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한다.  이제까지는 각 도시를 방문하거나 여로상에 있던 믿는 형제들을 방문하며 사역해온 바울이지만, 원래 계획하지 않던 '야만인들'에게도 인도함 받는다.  이 멜리데라는 섬에서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독사에 대해 상함을 입지 않은 기적에 대한 언급과 보블리오의 부친을 비롯 많은 이들의 병을 고친 것이 나오는데, 11절은 바울 일행이 그 섬에서 석 달이나 있던 것을 기록하기 때문에 아마도 복음이 그 어떤 모습으로라도 그 섬 주민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물론 제약은 있었겠는데, '야만인'은 헬라말을 못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잦은 무역으로 인해 그 섬에도 헬라말을 그래도 조금은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소위 '오지선교'를 연상하게 하는데, 오지선교에 대해 일반적인 편견이 있는 것이 바로 비교적 잘 살고 문화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못 사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구제사역을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19세기에 소위 White man's burden 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문화가 상대적으로 뛰어난 백인들이 그렇지 못한 다른 민족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베풀어야 한다는 부담을 말하는 한 편, 또 다른 면은 제국주의를 합리화 함으로 소위 백인우월주의가 은연중 드러나는 점이었다.  소위 대항해시대 때부터 많은 서구 열강들이 여러 나라를 침략하기 전 선교사들을 보냈던 것 처럼 이 white man's burden은 백인들의 머리에 오래도록 박혀있는 이중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몇몇 나라들에 단기선교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후진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정말 쉽지는 않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삶의 기쁨과 행복과 위로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만 하는 사역은 그들을 망쳐놓기 일쑤다.  자신들이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의 도움에만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어떤 면으로 '의료사역 (혹은 치유사역)'을 했던 것 처럼 (8-9)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분명 존재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10).  특히 요즘처럼 도시화가 두드러지면서 더 이상 오지를 발견하기 쉽지 않은 때에는, 당황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현지' 혹은 '선교지' 혹은 '야만인 서식지(?)'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적 교육 보다는 세상의 문화에서 배운 것들에 의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타문화적이 되어 버리고 이는 우리에게는 야만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야만적'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로든 물질로든 문화로든 의식으로든 상대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비로소 배울 때는,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한번 파선을 경험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때다.  바울에게는 파선에 대한 책임이 없었지만, 이번 멜리데 섬의 경험을 통해, 특히 누가가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메섹 선상의 체험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전에는 남을 이끌고 선동했던 그가 장님이 되자 남에게 이끌림 받았었다.

주님, 복음을 먼저 받은 자로서 우리는 절대 남보다 우월한 이들이 아님을 다시 깨닫습니다.  오직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우월한 문화를 매개체로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기 원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또 섬김으로 또 이해함으로 복음을 사역하게 하소서.  우리가 섬길 때 오히려 많은 은혜를 받음을 봅니다.  원가지를 아까지 않으셨던 주님께서 우리가 교만해질 때 우리도 아끼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다만 겸손으로, 주님을 경외함으로 주와 동행하게 하소서.

복음이 소위 야만인들ρβαρος' 에게도 전파됩니다. 소위 '오지 선교'라는 것이 비교적 잘 살고 문화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못 사는 곳으로 가서 사업을 벌이거나 혹은 구제사역을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단기 선교를 가보면 후진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정말 쉽지는 않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삶의 기쁨과 행복과 위로를 누린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만 하는 사역은 그들을 망쳐놓기 일쑤입니다. 바울이 어떤 면으로 '의료사역 (혹은 치유사역)'을 했던 것 처럼 (8-9)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분명 존재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10). 특히 요즘처럼 도시화가 두드러지면서 더 이상 오지를 발견하기 쉽지 않은 때에는, 당황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현지' 혹은 '선교지' 혹은 '야만인 서식지(?)'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적 교육 보다는 세상의 문화에서 배운 것들에 의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타문화적으로 되어 버리고 이는 우리에게는 야만적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야만적'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 내가 진리로든 물질로든 문화로든 의식으로든 상대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비로소 배울 때는,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한번 파선을 경험함으로 나 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던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때 입니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로서 우리는 절대로 남보다 우월한 이들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우월한 문화를 매개체로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또 섬김으로 또 이해함으로 복음을 사역해야 합니다. ( 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