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여호와의 궤를 옮겨 오는 길에 기돈의 타작 마당에 오자 타작 소리 때문이었는지 소들이 뛰어 궤가 수레에서 떨어질 것 같자 웃사가 궤를 붙들었는데, 이러한 행동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고 즉시 그를 치셨다 (원어) 기록한다.  이에 대해 다윗이 노했는데, 그는 무엇에 노했을까?  여호와께 노했던 것은 아닐 것이고, 웃사의 부주의 혹은 법을 무시한 것에 대해 노했을까?  아니면 그러한 일이 벌어진 그 상황 자체에 대해 노했을까?

우선 궤를 옮기는 일에 대해 민 4:15에는 진영이 진행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명들을 덮는 일을 마치고 나면 그 후에는 코핫의 아들들이 짊어지러 올 것이나, 그들은 어떤 거룩한 것도 만지지 말지니 그래야 죽지 않을 것이니라. 회중의 성막 안에 있는 이것들은 코핫의 아들들의 짐이니라 (한글킹제임스)’고 되어 있다.  개정판에는 죽을까 하노라로 되어 있지만 영어 킹제임스에는 lest they die  안그러면 죽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는 해석이 약간 불분명한데, 아예 죽을 것이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웃사는 이러한 경고를 경히 여겼는데, 그는 이에 대해 알고는 있었을까?

여호와께서는 웃사를 치셨고 (베레쯔)’ 그래서 그 곳은 베레스 웃사웃사를 치다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지명은 상황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결국은 웃사의 경거망동한 행동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있다.  웃사는 왜 그렇게 했을까?  여호와의 궤를 붙들려고 했던 조건 반사였을까?  귀한 것이 움직여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막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웃사 외에도 아히오 (7) 역시 함께 있었지만 아히오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웃사의 행동은 도를 넘었던 일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을 지키려는, 혹은 하나님 되려는 처사였다고도까지 말할 수 있는 심각한 죄였던 것이다.

오늘날 믿는 이들도 가끔 이러한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다만 예전 처럼 즉사하지 않는 은혜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자신만이 해야하는 것 처럼 여길 때가 많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6:29).  죄된 기질은 은혜가 아니라 자꾸 자신들의 믿음이 구원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원래 여호와의 궤를 지켰던 이들은 웃사나 아히오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원래는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기럇여아딤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구별해서 궤를 지키게 했다 (삼상 7:1).  하지만 엘리아살은 여기에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인물 둘이 나온다.  20년이 넘도록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엘리아살은 아마도 율법대로 궤를 잘 보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웃사나 아히오, 특히 웃사는 그러한 지식도 없고, 아니면 궤에 대한 경외심 자체도 없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궤를 보면서 기뻐하는 것을 수레를 몰고 있는 자신의 영광삼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다만 무익한 종 ( 17:10)’이라는 점을 잊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점은 그 이전에 있었다.  다시 민수기4:15을 보면 원래 성궤를 옮기는 것은 고핫 자손들이 하는 것이었고, 수레가 아니라 어깨에 짊어지고 이동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비나답의 아들들은 궤를 새 수레에 실었는데, 아무리 새 수레라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원래정하신 방법이 아니라, 삼상 6장에 원수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했던 동일한 방법을 따른 것이다.  더우기 삼상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고 기록하며 법을 어긴 대가에 대해 큰 경고를 하셨고, 이러한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것이지만, 웃사는 그러한 역사를 무시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정하신 것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주님께서도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19:8)’고 말씀하셨는데, 종교 개혁을 통해 로만카톨릭에서 개신교가 나왔지만, 교리가 다른 것 외에는 로만카톨릭의 어떠함은 거의 모두 다 가져 나왔다.  원래의 원리를 져버린 것이다.  다윗이 노한 것은 아마도 자신 역시 그 모든 과정을 지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셨던 (ordained) 것을 간과했음을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윗은 아마도 자신에게 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를 회복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 은혜가 왜 은혜인지 잊을 때가 많다.  죄가 그만큼 심각했고, 또 심각하기 때문에 은혜가 은혜로운 것인데, 은혜나 이 큰 구원을 경히 여기면 보응을 피할 수 없다 ( 2:3).  한 번 구원을 얻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지만,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안목과 입장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누가 진정한 구원을 얻었는지 알기 쉽지 않다.  그래서 평생을 잘 믿고 다른 이들을 믿음으로 이끌었던 것 같아 보이는 이들이 나중에는 배교하거나 이단으로 빠진다면 그들은 구원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자신이 하나님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참된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의 은혜는 크고도 놀랍지만 주님의 거룩하심과 그 심판하심은 너무도 두려운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것은 죄일 수 밖에 없음을 시인합니다.  정말이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일하고 있어지게 ( 2:12, 현재진행형 이태동사) 하소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더욱 붙잡습니다.

페북 나눔:

하나님께서 ‘원래’ 정하신 길을 따르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웃사가 궤를 붙들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고 즉시 그를 치셨는데, 웃사는 거룩한 궤를 만지는 행위가 자신이 하나님 되려는 것과 같은 심각한 죄임을 간과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궤를 보면서 기뻐하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다만 ‘무익한 종 ( 17:10)’이라는 점을 잊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이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자신만이 해야 하는 것 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6:29).  구원이 ‘은혜’이신 그리스도로서가 아니라, 죄된 기질은 자꾸 ‘자신들’의 ‘믿음’이 구원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먼저 ‘원래’ 민 4:15에는 ‘…코핫의 아들들이 짊어지러 올 것이나, 그들은 어떤 거룩한 것도 만지지 말지니 그래야 죽지 않을 것이니라… (한글킹제임스)’고 기록된, 즉 원수 블레셋 사람들 처럼 ‘새 수레’로가 아니라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옮겨야 함을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원래 ( 19:8)’를 말씀하셨는데, 종교 개혁을 통해 로만카톨릭에서 개신교가 나오기는 했지만, 교리가 다른 것 외에는 로만카톨릭의 어떠함을 거의 모두 다 가져 나왔습니다.  ‘원래’의 원리를 져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노한 것은 아마도 자신 역시 그 모든 과정을 감독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래' 정하셨던 (ordained) 것을 간과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자신에게 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를 회복했습니다.  참된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대상 13:9-14)

If we do not follow what God has ‘originally’ ordained way, we will face a serious consequence. Uzza touched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anger of the LORD was kindled against him and smote him. Uzza has forgotten that touching the Ark could mean making himself equal to God. He might have enjoyed people’s shouting for joy towards the Ark as if they were shouting for him, glorifying himself. He had forgotten that he is a mere servant (Luke 17:10). Many people may think even today that the work of God can be done through their own power. But the Lord says that the work of God is to believe in Him who God has sent (John 6:29). We tend to misunderstand that 'our faith’ has saved us instead of the ‘Grace of God’ which is Christ himself. 

Even before that, however, as Numbers 4:15 puts it, ‘…the sons of Kohath shall come to bear it but they shall not touch any holy thing, lest they die. (KJV) they were not supposed to move the Ark on a new cart like the Philistines did in 1 Sam 6, but they had to ‘bear’ it on their shoulder.

Lord Jesus also had mentioned the matter of ‘from the beginning (Matt 19:8)’. Although the evangelical churches came out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part from some doctrines, they adapted and continued most of that of RCC. We have forgotten ‘from the beginning’ or the matter of the ‘original’ all over again. David might have had angered toward himself in that through all of the processes of getting back the Ark, he had realized that he had indeed forgotten the originally ordained way of God. And he now had recovered his fear of God once again. The true salvation is nothing but knowing God and totally trusting in His Grace and Power. (1 Chr 13: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