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왕이 되자 주위 나라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두로 왕은 그의 궁전 건축을 위해 사신들과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는 반면, 블레셋은 다윗을 치러 올라온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께 묻고 그를 의지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군대가 있는지 또는 쳐들어온 블레셋은 얼마나 강한지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주께 묻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함으로 승리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을 현대전에 적용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현대전은 오히려 주님께서 눅 14:31-32에서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적용해야 한다. 현재 세상에서 제일 강한 미군 조차도 임전에 있어서는 모든 시물레이션을 통해 충분히 결과를 미리 알아보고,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이겨놓고’ 싸운다. 아무런 준비나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현실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원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서는 매우 현실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에 대해서는 이상적으로 행해야 한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육성으로 답하신 것 같다. 더우기 블레셋이 두 번째 침범하자 14-15 절은 하나님께서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고 매우 자세한 전술까지 일러 주신다. 요즘도 사업이나 그 외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그의 왕국을 위한 것이지 다윗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했던 것 처럼 육성으로는 말씀하시지 않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원어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 (히 1:2)’다. 그렇기 때문에 14장 내용은 적용면에서 우리에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원리를 보여준다. 영적인 것은 현실세계에 영향을 준다.
전쟁에는 공격과 방어가 있는데, ‘최상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영적 전쟁 역시 주님의 군사로서 적극적으로 악의 세력에 대항하며 하나님의 왕국으로 점령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점인데, 특히나 영적 전쟁은 우리 힘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주님께 붙어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영적 전쟁에 임하는 것은 영적 세계가 현실을 좌우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 둘에 차이는 있지만 둘을 나눌 수 없다. 나누면 이원적인 태도가 되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말할 때 아래와 같은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그림들이 많다는 것인데, 진정한 주의 군사의 모습은 마귀까지 무찌르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어야 한다. (인터넷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찾아보았지만 괜찮게 보이는 것은 중세 시대의 갑주가 조금 있고 로마시대의 것은 찾기 쉽지 않다. 두번째 그림이 그래도 제일 낫다. 누군가 일러스트를 잘 하는 사람이 좀 그리면 좋겠다. 특히 그 태도가 단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엡 6:13 말씀처럼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기 때문에, 지금은 싸움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몸을 약간은 앞으로 숙인 자세가 되면 좋겠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승리하셨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영적 전쟁은 오늘 말씀과 같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그래서 우리는 엡6장 처럼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는데, 이제까지 많은 설교에서 전신 갑주는 주로 방어를 위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11절은 전신 갑주를 입는 이유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함’ 즉 적극적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야고보도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하며 마귀는 우리가 두려워 하거나 피할 존재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며) 적극적으로 대적할 상대임을 선포한다.
예전에 한번 전신 갑주에 대해 나누었지만 다시 돌아보면, 우선 영적 전쟁의 대상은 엡 6:12 처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 사람들이 아니고 그 배후에서 조정하는 악한 영들이다. 그래서 마귀는 ‘간계 (메또데이아스)’ 즉 진리가 아닌 것들로 속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무신론, 다신론, 범신론, 삼일성부정 혹은 유일신부정, 단일신 사상, 진화론, 윤회설 등을 교묘하게 퍼뜨리며 특히 요즘은 동성욕 문제를 시작으로 소위 ‘성평등’을 주장하여 인간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엡 6:13은 우리가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함을 말씀하는데, 여기에는 동사가 '입다' 외에도 '대적하다’ 그리고 '서다' 등이 있다. 전신 갑주만 입어서는 안되고 그 '악한 날'을 대적하고 서기 위함이다.
14절에 다시 한번 '서라'는 명령을 하는데, 그 이유는 15-17절에 있다. 즉 진리의 허리 띠를 띠는 것도, 의의 호심경을 붙이는 것도,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는 것도,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들을 소멸하는 것도,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을 가지는 것 모두 다 서서 한다. ‘진리의 허리 띠’는 우리가 제대로 서 있는 것을 돕는데, 힘이 허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변치 않는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힘이 된다. 의의 호심경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의이다. 사실 여기 모든 갑주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전혀 없고 모두 하나님의 어떠한 것들인데, 하나님의 의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바탕으로 한 주어진 의이기 때문에 우리가 당당히 의지할만 하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은 우리가 밟는 모든 땅이 열악하지만 그 땅을 밟도록 준비되어진 평안의 복음이 우리의 발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이 ‘평안’은 ‘에이레네’ 즉 ‘평화’인데,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전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는 복음으로 준비된 신을 신음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전쟁의 과정과 결말과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평화이다. 우리는 평안함 안에서 싸운다.
믿음의 방패는 원수가 간교하게 발사하는 거짓말의 불화살을 모두 소멸한다. 거짓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들에 대해 믿음으로 대항하면 그 허무가 드러나며 불길은 꺼진다. 특히 이 방패는 온 몸을 가릴 수 있는 큰 사이즈의 방패다. 의의 호심경이 이미 있어서 안전하지만 믿음의 방패는 우리 온 몸을 보호한다. 이중 보호 장치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앞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입으세요’ 혹은 ‘취하세요’로 되어 있지만 구원의 투구과 성령의 검에 대해서는 ‘받으세요’라고 명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구원과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된다. 여기 '말씀'은 '레마' 즉 지금 즉각적으로 선포되어지는, 특히 나에게 혹은 교회에게 오늘 이시간 들려지고 적용되어지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으로 적극적으로 원수와 세상을 공격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우리를 지켜주는 다른 갑옷의 요소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을 위하지 않고 세상과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선포된다.
주님, 주의 몸된 교회가 군사로서 가공할 모습을 잃어 버리고 힘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통탄히 여깁니다. 모든 것에서 승리하신 심판자이신 주님,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이미 주신 전신 갑주를 다시 돌아 봅니다. 현실은 전쟁터임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믿는 이들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삶의 모든 면에서 이기고 또 이기게 하소서.
페북 나눔:
다윗은 오직 여호와께 묻고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군대가 있는지 또는 쳐들어온 블레셋은 얼마나 강한지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주께 묻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함으로 승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을 현대전에 그래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런 준비나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현실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원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서는 매우 현실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에 대해서는 이상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에서 이러한 영적 전쟁에 임하는 것은 영적 세계가 현세계를 좌우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에 차이는 있지만 둘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누면 오히려 이원적인 태도가 됩니다.
싸우기 위해서는 엡 6장 처럼 전신 갑주가 필요한데, 아쉬운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말할 때 아래와 같은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그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의 군사의 모습은 마귀까지 담대히 대적하는 가공할 만한 것으로, 두번째 그림에 가깝습니다. 많은 설교에서 전신 갑주는 주로 방어를 위한 것으로 설명되었지만 엡 6:11절은 전신 갑주를 입는 이유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함’ 즉 적극적인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야고보도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하며 마귀는 우리가 두려워 하거나 피할 존재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며) 적극적으로 대적할 대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으로 적극적으로 원수와 세상을 공격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우리를 지켜주는 다른 전신 갑주의 요소들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은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라고 기록하는데, 다윗은 '너희'와 '우리'라고 합니다. 웃사 개인의 잘못이나 혹은 일의 모든 것을 책임진 자로서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고 '내가'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우리' 또 레위 지파에게는 '너희'라고 하는데,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절대권력자이지만, 언약궤에 대해서만큼은 레위 지파에게 위임된 것입니다. 왕이 잘못된 명을 내렸거나 언약궤에 대해 말씀대로 따르지 않을 때에는 레위 지파가 일어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레위 지파는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현시대의 목회자들이 레위 지파와 동일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왕국 혹은 기독교 내에 잘못된 것들이 발생할 때 서로 눈치를 보거나 '왕권'에 눌려서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한다면 '웃사'가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웃사'의 죽음은 결국 '우리'의 죽음입니다. (대상 15:1-15)
다윗왕도 음악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 (삼하 23:1)'였지만, 언약궤가 들어오는 날의 행사에 대해서는 레위인들에게 위임합니다. 다윗이 명한 것은 '형제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16절)' 정도 였습니다. 그 후에는 레위인들이 알아서 사람들을 세우고 음악도 그에 맞게 정합니다. 23절은 '베레갸와 엘가나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요' 또 24절 후반은 '오벧에돔과 여히야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이더라'고 했는데, 원어에는 궤 '앞'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궤(의) 문지기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문지기'라는 말은 문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keeper' 즉 경호원이라는 뜻도 있으며 킹제임스에서는 'porter' 즉 '운반인'으로 번역한, 여호와의 궤를 짊어지고 가는 앞뒤 두명씩 네 명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거룩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운반하기 위해서 거친 길들 위에 함께 완벽한 보조를 맞추어 걸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함께 멍에를 진 주님의 일꾼들이었습니다 (빌 4:3). 오늘도 이러한 함께 멍에를 멘 동역자들이 주의 거룩하신 사역에 충성하는 모습을 이땅 곳곳에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대상 15: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