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백향목 궁에 살지만 반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마치 노숙자 처럼 천막에 놓여진 것을 보고 다윗은 이제 언약궤가 영구히 위치할 성전을 짓기 원함을 나단에게 말한다.  이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그 아들 중 하나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보시고 그와 그의 집을 크게 복주신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인 (대상 22:8, 28:3) 것도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전에 이에 대해 불평하거나 명하신 적이 없었다고 밝히시는데 (5-6), 원래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고 온 우주에 충만히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더우기 이러한 물질적 성전이 후에는 미신적인 요소로 변질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적인 모습으로 전락하게 되어, 구약은 물론 주님께서도 헤롯 성전 역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 24:2, 13:2)'질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고,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전 3:16).

또 하나의 이유는 한 사람이 너무나 많은 위대한 일들을 이루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 다윗이 성전을 지었다면 솔로몬은 부각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울은 시작했지만 폐해짐을 당했고 다윗은 분투하며 기틀을 잡았으며 솔로몬 시대는 영화로웠다.  베드로만 부각되었다면 바울은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부각되고 영광받으시는 분은 한분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우리의 구원 역시 사울처럼 옛 사람으로서 우리들은 시작했지만 옛 사람은 폐하고, 현재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  그럼으로 영화롭게 된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본다.  바울은 이에 대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2:12)'라고 했고,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8:30)'고 말하는데, 사울로 시작한 이러한 일련의 영적 여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믿는 이들이 현실에서 경험하고 누리며, 마지막에 얻게 될 영광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2:12 '구원을 이루라' ' 8:30 '영화롭게 하셨다'를 좀 더 묵상해 보는데, 이 두 구절은 결국은 허물어지고 따라서 불필요했던 과거의 물질적인 성전이 아니라 주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성전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는 건물인데, 이것은 구원과 관계가 있다.  '구원'이 단지 지옥신세 면하고 '천당가는 것'이라면, 그러한 '구원'은 다른 종교에서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받고 또한 '이루'어야 할 구원은 원어 '카트에르가제스떼'의 현재진행형 이태동사임을 볼 때, 바로 오늘 이 순간 우리가 구원을 계속 받고 있어야 (구원의 역사가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주며, 또한 이태동사는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우리 역시 이 구원역사에 '두렵고 떨림으로' 동참해야 함을 말씀한다.

8:30의 모든 동사는 아오리스트 시제로 되어 있는데, 영어나 한국어는 아오리스트 시제를 보통 과거형으로 번역했지만, 원래 아오리스트는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그래서 '또 그들을 미리 정하시다 또한 부르시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다 의롭게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모든 말씀은 그 원래 언약에 따라 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엡 2:22 '그 분(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도 영 안 하나님의 처소() 안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원어 참조)'라고 밝힌다.  다윗이 그렇게 원했던 성전, 아니 그 보다 더 탁월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주님의 그 구원 역사에 저도 동참하기 원합니다.  바울은 그 원함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보이시며 또한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심을 봅니다.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가 경험하고 이루며 살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서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음을 보게 하옵소서.  다윗이 자신의 부함에 비해 하나님께서 장막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 처럼, 우리가 아직도 개인적인 구원으로만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감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게 하소서.  주의 구원하심이 오늘도 계속됨을 감사합니다.

페북 나눔:

물질적인 성전보다 더 귀한 주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신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갑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살지만 반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마치 노숙자 처럼 천막에 놓여진 것을 보고 다윗은 이제 언약궤가 영구히 위치할 성전을 짓기 원함을 나단에게 말하는데, 이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그 아들 중 하나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보시고 그와 그의 집을 크게 복주십니다. 사울로 왕국은 시작했지만 그는 폐해짐을 당했고 다윗은 분투하며 기틀을 잡았으며 솔로몬 시대는 영화로웠습니다. 옛사람은 이미 폐했고, 우리는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기 분투하며, 결국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나 베드로만 부각되었다면 솔로몬이나 바울은 드러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각되고 영광받으시는 분은 한분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그 원래 언약에 따라 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엡 2:22 '그 분(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도 영 안 하나님의 처소() 안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원어 참조)'라고 밝힙니다. 다윗이 그렇게 원했던 성전, 아니 그 보다 더 탁월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구원으로만의 관점에서 벗어나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구원하심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상 17:1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