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종말론과 말세 신앙에 대한 재고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부정적인 인상을 줍니다. ‘시한부’라는 말 자체가 자극적이고, ‘종말론’이라는 용어 역시 정상적인 신앙 담론보다는 극단적 주장과 연결되어 사용되어 온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용어는 여러 이단들이 즐겨 사용해 왔고,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던 신앙 공동체들조차 종말의 날짜와 시점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이단적으로 변질된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미 2,000년 전부터 ‘마지막 때’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아직 가시적으로 성취되지 않았기에, 과연 종말과 주님의 재림이 실제로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막연함과 회의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상황들을 바라볼 때, 지금이 말세라는 인식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삶

베드로전서 4장은 말세를 사는 성도의 태도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어서 사도는 뜨겁게 서로 사랑할 것,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할 것, 각자 받은 은사로 서로 봉사할 것을 권면합니다. 또한 불시험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역시 말세적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은 성도에게 합당하지 않으므로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하며,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권면합니다.

이 두 본문을 종합하면, 말세를 사는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핵심은 분명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깨어 기도하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의 의미

이전에 제가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방식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며칠 안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된다면 분명 시한부 종말론적 주장으로 보일 수 있고, 이단적 사고와도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단들의 시한부 종말론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세상 속에서의 책임을 무가치하게 만들며, 과도한 헌금을 강요하고, 그 과정에서 지도자들이 사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는 시한부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 즉 성경적 말세 의식이 됩니다.

말세는 이미 시작되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말세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개인의 삶으로 보아도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하더라도 인생은 여전히 유한합니다. 이런 점에서 말세는 항상 현재적이며, 우리는 늘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시간이 많지 않다”는 표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지금의 ‘종교 생활’을 벗어나 참된 ‘신앙 생활’로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한번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교회 생활이 정말 신앙의 삶입니까, 아니면 단순한 종교 활동입니까? 예배가 여러분의 일상에 실제적인 변화를 주고 있습니까? 최근 예배를 통해 생명의 충만함과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종교 생활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신앙과 공동체의 구조 자체를 새롭게 재정비해야 합니다.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재정비는 개인의 결단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소그룹이나 새로운 모임이 필요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기존 교회 구조 자체가 종교적 관성을 버리고 유기적인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회적·법적 제약이 강화되어 교회가 자유롭게 모이기 어려워진다면, 결국 신앙은 개인과 가족, 혹은 극소수의 공동체 안에서만 유지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가서 “그때는 그때 가서 하면 되지”라고 말한다면, 이미 너무 늦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존 교회들이 성령의 인도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집착한다면, 앞으로의 교회는 대형 구조가 아니라 초대교회와 같은 가정교회, 소수 공동체의 형태로 남게 될 가능성도 큽니다.

휴거와 깨어 있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간이 더욱 촉박해진다면, 그것은 곧 휴거의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은 그 날이 성도들에게 도둑같이 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깨어 있는 자라면 전혀 감각 없이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휴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환란 전 휴거, 환란 통과 후 휴거, 혹은 단계적 휴거 등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믿음의 신비로움 속에서, 어떤 수준의 믿음이 휴거와 직접 연결되는지를 우리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휴거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휴거된 인물로 언급되는 이는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특히 에녹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간단히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동행’은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전인적 순종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정도가 되니 휴거를 당했다 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도 자세히 보면 둘 다 정성껏 예물을 드리기는 했는데요, 가인은 분명히 자기 목숨과 안위를 위해서 농사를 지어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실 땅의 소산을 드렸지만, 아벨은 100% 제사를 위해서 평생 양을 쳤습니다. 당시에는 동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받지 않으셨지만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노아의 시대와 같을 거라 말씀하셨죠. 그때가 아주 악하고 음란했던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수억 혹은 수십억 당시 살던 사람들 중에 노아의 가족 8명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렙다 과부, 또 나아만의 얘기를 말씀하며 당시 오직 각 1명만 구원 받았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금 지구상에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들 중에 휴거를 당할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인가? 그 외에는 멸망하는가?  만일 그들 중에 대다수가 휴거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단계적 휴거를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휴거는 환란 전에 정말 신실한 그리스도인. 즉 에녹처럼 온 생애 매일의 삶에서 100%를 하나님께 드린 극소수의 사람들이 먼저 휴거를 받고 그 다음에 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시험 즉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인데 고후 13:5는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런 시험을 받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알기 쉽지 않기 때문 입니다. 시험을 통과해야만 내 믿음이 확정이 됩니다.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으로 온전히 믿고 입으로 그것을 확실하게 선포한다면 구원을 받겠지만, 평안하고 편리한 가운데 그렇게 고백한 것이라면, 정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러한 확신이 있을까요? 이 휴거의 문제는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에 대해 소망을 품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살전 4:13, 18절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살전 4:15, 16절은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이 휴거될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결론: 지금이 점검의 시간이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말은 며칠 혹은 몇 달 안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구조를 재정비하고, 주님과 진정으로 동행하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환란 전에 휴거를 기대할 만큼의 신앙을 살고 있는가? 만일 환란을 통과하며 믿음이 시험된다면, 나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끝까지 견디는 자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자유롭게 교회에 모일 수 있는 지역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한국의 상황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휴거의 여러 해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각자는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과 더불어 휴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 은혜를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