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더우기 오늘 말씀이 칼빈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지만 왠지 칼빈주의를 생각나게 했다. 특히 칼빈 (혹은 깔뱅)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은데,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성도의 견인'은 칼빈주의 입장에서는 언어 선택을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중학교 때 장로교 입교 문답을 하면서 소위 TULIP에 대해서 배웠는데 다음과 같다.
1)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
3)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만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을 위한 속죄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다.
5) 성도의 견인 (堅忍 Perseverabce if Saints) -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인간은 견고하게 인내 (견인)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그 자유의지의 결과 역시 모르실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아담의 범죄를 통해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런데 이 '전적타락'은 어떤 숫자나 확률적인 문제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노아시대 때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창 6:9),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음으로 더 이상 이 땅에 없음을 보여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하지만, 신약에도 '의인'으로 칭해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이러한 '의인'은 상대적인 의인이지 절대적 입장의 의인은 아니다. 아무튼 이 '전적타락'이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구원 사역의 주체가 되시며, 단순한 '의인'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롬 3:23)는 문제에 있어 사람은 그 능력과 목적을 상실했음을 설명하는 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교리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전적타락에 따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불가피하다. 논리적으로 보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한속죄'는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이 '만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히브리서에 여러번 나오는 '단번에' 라는 단어는 효력이 없어진다. 더우기 침례자 요한은 '믿는 자들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주님을 소개했다. 그래서 성경은 '죄'라는 것이 어떠한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속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말씀한다 (요 16:9). 즉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은 만인을 위한 것이고 영단번에 이룬 것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효력이 없는 문제가 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불가항력적 은혜'인데, 아쉽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은 충분히 거역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 (롬 1:20)'음에도 아예 믿지 않는 이들도 많고, 배교자들이 생기기도 한다 (히 6:6). 물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창세전에 택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속한 문제이지 인간이 교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에 맞출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지존하심과 은혜를 믿기에 마지막 '성도의 견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면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썼느냐에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문제가 성도의 견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견인(牽引 끌어 당김) 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칼빈의 5대 교리가 사실은 칼빈 자신이 정리한 것은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것이다. '개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5대 교리가 이제 보충 혹은 수정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이라는 기본 진리는 바뀔 수 없지만, 이에 대한 교리는 재정리되고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느헤미야와 백성들의 사역을 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오히려 소위 '프로파간다'로 이해할 수 있는 대적들의 궤계를 눈치채고 이에 대해 준비하며 사역하는 동시에 언제라도 싸울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소위 '세대주의적 종말론'과 그를 비판하는 개혁신학 입장의 종말론에 대해 또 궁금해진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니 혹은 그에 대해 개혁신학 관점의 소위 '역사적 전천년주의' 혹은 무천년주의건 아니건 간에 건강한 신학과 신앙으로 종말에 대해 이해하며 주어진 삶을 열심히 주를 위해, 또 주와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마치 느헤미야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손으로 일하고 다른 손에는 무기를 잡은 것 처럼.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시한부 종말론 혹은 아들도 모르시는 종말의 때를 안다고 말하거나, 카리스마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결국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낸 여러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문제로 여기지만,
개혁신학은 매우 깨끗한 신학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동시에 너무 독단적이라는 느낌도 들게 한다. 개혁주의 역시 세대주의 처럼 또한 하나의 '주의'이다. 개혁주의자 분들이 세대주의적인 신학을 이단으로 매도해버리면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탈봇신학교나 풀러신학교에는 유학오면 안된다. 물론 이러한 세대주의 사상이 소위 '신 사도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겠지만, 어디 그에만 영향을 주었을까?
청교도 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천년 왕국에 대한 해설은 다양했다.
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자'는 아니지만 그에 가깝다. 성경이 그렇게 이해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