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아내의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너무 좋아지셔서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어제 갑자기 위독해 지시더니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 다행히 아내의 전도와 권유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셨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예수님만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것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죽음은 구원을 위해 쓰임 받음을 본다. 주님의 구원역사가 마무리 될 때 사망도 더 이상 쓸모없어 사라질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기근을 피하기 위해 블레셋으로 피신하게 한 엘리사의 권유가 옳은 것이었나? 나병으로 하얗게까지 된 모습으로 과연 게하시가 왕 앞에 설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나아만 이전 일인가?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문단 전체를 읽으며 ‘구속’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구속’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를 보니 ‘구속’은 없지만 ‘회복 (restore)’이라는 단어가 5절 (다시 살린)과 6절 (돌려주라) 에 있다. 구속이라는 단어와 회복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졌다.
구속은 보통 ‘사람’이 목적이고 회복은 ‘만물’ 혹은 ‘땅’ 등에 많이 쓰였던 것 같다.* 개정역에는 ‘구속’이라는 말을 모두 ‘속량’으로 바꾼 것 같은데, 아마도 ‘구속’이라는 말이 ‘묶어 놓다’라는 말과 헷갈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에서 사용한 구속이라는 말은 ‘구해서 속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마도 ‘속량’이라는 뜻이 원어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가끔 마켓에서 쿠폰을 쓸때도 redeem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redeem 혹은 redemption 뜻은 ‘어떠한 것에 대해 값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얻다 혹은 다시 얻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많은 경우에 썼기 때문에 그 개념이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예를 들어 룻 3: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사역은 온전하신 구속을 보여준다.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죄를 지음으로 죄의 자녀로 묶임 받았던 인류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어린양으로 내어주심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께 다시 사오셨다. 그래서 구속 혹은 속량은 그 원인이 인간의 범죄함이 된다. 범죄함 없이는 구속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적으로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미 끝났다.
반면에 ‘회복’은 ‘원래의 것으로 되돌려 놓다’이다. 원래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질서와 영광으로 가득했었기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 (욥 38:7)’ 었지만 사단의 반역으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 (창 1:2)’게 되었다. 그래서 창세기의 ‘창조’의 기록은 사실 ‘회복’의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노아의 홍수로 지구는 다시 회복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회복’을 지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계 21:5). 오직 하나님만 진정으로 새롭게 하실 수 있고 회복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이유야 어쨌든 수넴 여인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와 필요한 것은 그 땅의 회복이었다. 그런데 왕은 그 땅은 물론이고 지난 세월 소출도 모두 돌려받게 한다. 지난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동행함으로 많은 것을 누렸던 때가 있는 반면 정말 나의 교만과 욕심으로 세월 허송한 것도 얼마나 많았는지… 하지만 그 구멍 뚫린 것 같은 삶의 부분 부분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되돌려 받는 것도 있음을 본다.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 구속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오늘 나의 삶과 주의 교회에 있게 하소서. ‘개혁은 회복’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습니다. 정말 주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그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개혁이 있게 하소서. 그것이 바로 수넴 여인이 그 땅을 회복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임을 믿습니다. 능과 힘이 아니라 오직 주의 영으로 됨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