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연구
1:1-3
영번역은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라고 시작한다. 요한이 쓴 책이지만, 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하며 요한은 이 계시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우리말 제목 '요한계시록' 보다는 그냥 '계시록'이 나을 듯 하다. 원어 '계시 ἀποκάλυψις'에는 정관사 '호 the'가 없지만 영어 문법상 정관사가 없으면 이상하기 때문에 정관사를 넣었다. 대신 원어에는 '하나님'에 정관사가 붙었는데, 영어는 그냥 대문자 God으로 해서 바로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계시'로 번역된 단어는 ἀποκάλυψις로 원래 의미는 '떨어지다, 멀다'를 의미하는 '아포'와 '숨기다'를 의미하는 '칼룹토'의 합성어로 '나타나다 드러나다'를 말하는 동사형 '아포칼룹토'에서 왔지만, 라틴계 언어로 번역되면서 (아마도) 이 계시록 내용 때문에 영어 apocalypse라는 말은 '계시'가 아니라 '파멸' 혹은 '종말'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 여러 구절에서 '나타내다, 드러내다, 계시하다' 등으로 쓰였다.
그래서 사실 이 계시록의 핵심은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하심과 땅에서 고난을 받으며 믿음을 지킨 그의 백성이 앞으로 누릴 영화를 드러낸 책이다. '속히 일어날 일들 (원어로는 급함 안에)'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 '급함 안'은 시간적으로 급한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다. 만일 시간적으로 급한 것이라면 이러한 기록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행 12:7은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라고 기록하는데, 여기 '급히'가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이것은 시간상 2천년 전에 빨리 일어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일어날 때 그 상황이 급박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또 여기 '일어날'의 원어는 ginomai 즉 '되다'라는 말의 아오리스트 시제 ginosthai인데, 보통 아오리스트를 과거로 번역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오리스트는 말 그대로 시간을 초월한 시제이다. 언제 일어날지 혹은 일어난지 모르지만 그 되어질 때 매우 급박하게 될 것이다.
3절은 '행복한(이다)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고 있는 자 그리고 듣고 있는 자,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이는 그 때(카이로스)가 가깝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는데, 이 '행복'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복이며, 이 '때' 역시 '크로노스' 아닌 '카이로스'이기 때문에 이미 2천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아직도 '급함 안'에서 가깝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적으로도 난제이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카이로스가 가까운 이유는 4절 중 '장차 오실 이'로 번역된 부분이 원어에는 '오고 계시는' 즉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동사형태는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에서 '오리라'와 '오시옵소서'의 시제와 동일하다. 즉 원어는 '내가 속히 오고 있다' 그리고 '오고 계시옵소서' 인데, 이러한 시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임을 말함과 동시에 곧 드러날 일들을 의미하며 믿는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동시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고 하셨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오고 계시다.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말씀들을 읽고 듣고 그 안의 내용들을 지켜야 하는데, 단지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해 말씀을 살아내야 한다.
4-8
4-5절을 원어에서 직역하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가 여러분에게, 그리고 평강이, 그 이시고 그 이셨고 그 오고 계시는 분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보좌의 목전의 일곱 영들로 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그는) 그 증인, 그 신실하심, 죽은 자들의 장자, 땅의 왕들의 통치자 (이시다) 우리를 아가파오하고 계시고 그의 피를 통해 우리의 죄들 밖으로 우리를 놓으시고' 정도가 되는데, 때는 흘러 더 이상 예루살렘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고 이제 무대는 아시아로 바뀌었다. 이 때 요한의 심정은 어땠을까? 쉽지는 않았겠지만 바로 이러한 '때, 카이로스'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이러한 '아포칼룹시스'를 보여 주시고 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게 하신다.
신약의 문안 인사인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그 이시고 그 이셨고 그 오고 계시는 분'과 '그분의 보좌의 목전의 일곱 영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모두 '~로부터'가 붙어있다. 이 셋은 하나라는 의미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승천하셨지만, '그 증인, 그 신실하심, 죽은 자들의 장자,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데, 우리를 아가페하고 계시고 (현재진행형) 그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사하셨다.
이정도만 해도 대단한데, 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그의 아버지에 대해 우리를 왕국과 제사장들로 만드'셨다고 한다 (원어참조). 벧전 2:9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기록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또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세세토록. 아멘' 이라고 기록하는데, 우리가 알던 알지 못하던 그리스도는 세세토록 그 영광 가운데 통치하신다. 이러한 주권 혹은 통치를 깨달을 때 인내 안에 신앙 생활이 가능하다.
7절은 '보시오,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고 계신다'로 시작하는데, 개정역 처럼 '구름을 타고' 오시진 않는다. 여기 전치사는 '위 ep' 혹은 '안 en'이 아니라 '함께 meta'인데, 이 '구름'은 히 12:1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처럼 주님의 증인들과 함께 오신다는 의미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승천하셨던 것과 동일하게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행 1:11), 승천하실 때 구름이 가리워 주님을 보이지 않게 했던 것 처럼 (행 1:9) 물리적인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그리고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찌른 이들도,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 위에 통곡할 것이다 그렇다! 아멘!'라고 이어지는데, 주님 오실 때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을 말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그 때, 그의 백성은 휴거를 통해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구름 처럼 임하지만 땅의 모든 족속들은 땅에서 그의 재림을 보고 통곡할 것을 예언한다.
8절은 '나는 그 알파와 그 오메가, 시작과 완성이다 라고 주 그 하나님 그 이시며 그 이셨고 그리고 그 오고 계시는 그 전능자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라고 기록한다. 여기 '나는 ~이다'는 '에고 에이미'인데, 요한 복음에서 많이 나온 것이며, 구약의 '여호와'와 같은 맥락이다. 오직 주님만이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시다. 그는 '그 알파와 그 오메가, 시작과 완성'이시기 때문이다.
9-20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가장 귀한 복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또한 믿음의 형제들과의 교제이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쓰는데, 이러한 귀한 교제를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됨으로 강탈 당했다. 한 사람으로서는 교회가 될 수 없고 적어도 두 세 사람은 함께 해야 교회 혹은 엨클레시아로 모일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요한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해서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했고 또한 공간상으로는 떨어진 형제들과도 교제를 했는데, 그래서 9절은 '나 요한은 또한 너희 형제요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인해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노라'고 기록한다. 이 '동참'은 '함께 교제하다 함께 나누다 (순 코이노노스)'의 의미이다.
당시 요한은 유배되어 밧모라는 섬에 갇혔었지만 이 시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들은 아마도 선교사들 아닐까 한다. 정착이 되어 교회를 섬기는 선교사들은 예외적이지만 정말이지 영적으로 섬 같은 곳에 가서 홀로 복음을 지키며 전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는 물론이고 사는 것 자체가 버거울 것이다. 이를 위한 해결점은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이고 그 비밀은 10절에 있다.
여러 한글 번역본은 10절을 '내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혹은 '성령에 사로잡혀' 혹은 '성령이 임하여' 등등으로 번역되었는데, 킹제임스는 원어와 가깝게 '성령 안에 있을 때에'라고 했다. 원어에는 단지 '내가 그 영 안에 있었다 (혹은 되었다)'로 되어 있는데,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는 이 시대에 바로 이 '영 안에 en Pneumati'에 있는 것에 그 비밀이 있다. 요한은 '영 안에' 있었다. 또 하나의 비밀은 '주의 날'인데, 이것이 요즘 말하는 '주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어에는 정관사 '호'가 있어서 '바로 그 주의 날'을 의미하는데, 이 '주의'라고 번역된 '꾸리아께이'는 '주의 만찬'과 더불어 여기에만 사용된 단어다. '주의 날'은 '하나님의 때'와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하는데, 항상 돌아오는 주일이 아니라, 주께서 정하신 바로 '그 날'이다. 우리가 영 안에 있어도 특별한 계시는 주께서 정하신 때에 드러난다.
'영 안에' 있을 때 그는 뒤에서 큰 소리가 나서 뒤돌아 봤는데, 이것은 계속해서 '영 안'인지 아니면 생시인지 사도 바울의 경험처럼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그가 목격했고 처음 본 광경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닌 신성하고 두려운 모습의 그리스도셨다. 주님께서는 11절(원어)에 8절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시작과 마침 (혹은 완성)'이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신다. '시작과 완성'은 사역을 말하지만 '처음과 마지막'은 역사 즉 시대와 시간을 말한다. 주님은 역사 안에서 사역을 완성하셨다.
이 때가 요한에게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후에 처음으로 영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경험을 한 것인데, 과거 이 땅에서 뵙던 주님과는 완전히 다른, 영광을 완전히 회복하신 모습이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처음 말씀하신 것은 '기록하라 그리고 보내라'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명령은 모두 아오리스트 시제인데, 보통 주인이 종에게 명할 때는 현재진행형을 쓰지만 상대방을 존경할 때에는 아오리스트 시제를 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주시지만, 그의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고 주님의 고난과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요한에게 주님은 격을 갖추어 말씀하신다. 그래서 '기록하시오 그리고 보내시오' 정도가 되겠다.
17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라고 다시 '처음과 마지막'을 말씀하신다. 요한에게 있어 오신다 약속하신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인내'해야 했는데, 주님께서는 이 '처음과 마지막'을 또 다시 말씀하신다. 아직 주께서 정하신 인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주의 재림은 분명히 있다.
18절은 '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하는데, 한번 죽었지만 이제 살아 있고 영원토록 살아있는 분으로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 (문자적으로는 자물쇠)를 가진 분이라고 말씀한다. 주님은 생명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바로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이다. 요한이 뒤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가 처음에 본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일곱 등잔대였는데, 주님께서는 이 일곱 교회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이 일곱 교회는 주님을 정체성으로 갖는다.
2:1-11
에베소 교회
1절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는데, '편지하라'의 시제는 아오리스트로 '편지하시오' 정도로 이해된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이시지만 그의 신실한 종들을 단지 '아랫사람'으로 보시지 않고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지닌 인격체로 존중하신다. 여기 '사자'는 '천사'와 동일한 '앙겔리온' 즉 영어로 angel이다. 흥미로운 것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나 '집사'에게 편지하라 하시지 않고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명하시는 점인데, 이 '사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사람이 아니지만,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천사처럼 여기신다. 갈4:14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고 기록하는데, 갈라디아 전역에 위치했던 교회들은 바울을 천사 혹은 그리스도 처럼 영접했다.
이러한 개념 혹은 신앙은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특별히 언급한 니골라당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 일이나 집회 인도는 특별한 계급이나 타이틀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고 성장한 사람이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지도자'를 '천사' 혹은 '사자'로 부르신다. 이 '사자'와 '7절부터 계속 나오는 모든 '이기는 자 (혹은 정복자)'는 모두 단수인데, 바로 신앙의 핵심을 잡고 주님 약속하신 것들을 취하는 이로서 이러한 사람이 바로 '사자'이며 '이기는 자'이다. 누구든 현재 신앙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다하고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며 주의 왕국을 위하는 자는 이 '사자'이다.
에베소 교회에 계시된 주님의 모습은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인데, 에베소는 '처음'이라는 말이 많은 것 처럼 첫번째 즉 초대교회이지만, 그들 시대에 주님이 오시진 않으셨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외에도 여섯 교회가 있으며 혹은 있을 것을 알고 인내해야 했다. 그래서 2-3절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행위 (에르곤)'은 '일들' 복수로서 초대교회에는 정말 많은 사역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역들은 그들에게 '수고 (코포스, 고생)'를 가져왔고 또한 '인내'를 이루게 했다. 일들과 고생 없이는 인내도 없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했는데, 교회가 '은혜'라는 말을 오용하여 악한 자들과 그들의 악한 일들을 허용하면 안된다. 이러한 것 역시 고생과 인내를 요구하는데, 특별히 이 악한 자들 중에 '자칭 사도들'이 있었다. '사도'라는 것은 그 권위가 대단해서 아무나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직분 혹은 위치지만, 에베소 교회는 그러한 것을 해내었다. 이것은 다시 '니골라당'과 연결된다. 이러한 신실한 태도는 다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혹은 낙심하지 않은)' 것으로 열매 맺는다. 그리고 이 모두는 '내 이름' 즉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도 완벽하게 보인 에베소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을 대적하고 싸우고 여러 일들을 해내며 예수의 이름은 붙잡고 지키는 그들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릴 수 있었을까? '책망'이라는 말은 '카타'로 '대적하다'를 의미하는데, 주의 몸된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항상 사랑으로 보시지만 않고 '대적할만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사랑'은 문자적으로 '너희들의 아가페, 그 처음 (프로토스)'인데, 이 '처음'이라는 말은 1장에도 '처음과 나중'으로 두번, 여기 2장에도 네번이나 나온다. 무엇이든 처음을 잃으면 문제가 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5절에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한다. 여기 이 '처음 행위' 역시 '프로토스'인데, 그렇게 보면 이 '아가페'와 '행위'가 연결된 것임을 볼 수 있다.
'처음'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도 있고 공간적이나 가치적인 의미등 모든 것을 말한다. 에베소 교회는 역사적으로 첫째 교회는 아니었지만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에는 이 교회가 매우 영광스러운 교회였음을 볼 수 있다. 주님에게 있어 이 에베소 교회는 마치 둘째 태생이 더 위대해지는 것 처럼 아마도 영적으로는 첫째가 아니었나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 에베소 교회를 언급하신다. 영적인 성장은 시간에 국한받지 않는다. 몇십년 종교생활을 한다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영적 교만의 뼈가 굵어질 수 있다. 늦게 주님을 만나도 바울처럼 확실히 만나면 나중된 이로서 처음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아가페 그 처음'을 기억해야 하며 우리 삶 속에서 처음에 위치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6절에는 '니골라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에는 '당'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니골라들'이며, 15절 역시 같은 단어가 나오며 행 6:5 역시 같은 말이 있지만 여기와는 연관이 없는 사람 이름이다. 계시록은 많은 때 문자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니골라'라는 말은 '니코스 (이기는 자의 이기다 혹은 정복하다)'라는 말과 '라오스 (백성, 평민)'의 합성어이다. 즉 '평민을 정복하다'라는 말인데, 이것은 세상적으로는 백성을 압제하는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와 연결되지만, 여기는 '교회'를 말씀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이러한 특별한 몇몇 사람 특히 사제나 목회자들이 고집할 수 있는 교권주의를 말한다. 즉 특별한 교육이나 특별한 의식을 통과한 이들만이 특별한 집례를 할 수 있고 특별한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주님께서는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이 몇 있는데, 바로 이 니골라당이 그 중 하나다.
7절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는데, 지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는 내용이지만, 초대교회 즉 이제는 더 이상 없어진 교회라고 해서 그 말씀의 내용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 즉 일곱 교회 모두에게 성령은 지금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 '귀 있는 자'와 '이기는 자 (혹은 정복자)'를 연결하는데, 성령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는 이기는 자이며 그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을 것이다. 이기는 자로서 누릴 하나는 과거 죄를 지음으로 금지되었던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편지하는데, 이 교회는 특히 고난의 교회다. '서머나'라는 말이 'myrr' 즉 죽은 이들의 몸에 바르는 '몰약'을 의미하듯 특별히 로마시대에 벌어진 끔직한 환난을 통과하는 교회다. 이러한 고난을 당하기에 주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불쌍히 여기시며 소망을 주신다. 따라서 이 교회에 계시된 주님의 어떠하심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시다. 환난을 통해 죽임을 당해도 다시 살아날 것을 상기시킨다.
이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 보면 매우 힘들고 연약하며 고생하는 모습이지만 주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이다. 특히 이 교회는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았는데, 이제는 폐기된 과거 율법의 기능과 경륜을 들어 생명을 소유한 주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은 그들이 표면적 유대인임을 말한다 (롬 2:28). 종교적인 '정통성'이나 교권을 들어 다른 이들을 핍박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들을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라 부르신다. 우리는 소위 '이단 정죄'를 할 때 조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우리들 먼저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배우며 기꺼이 환란과 고생에 동참하는 제자되기를 힘써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고난의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내가 네 고난을 덜어주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장차 받을 고난'을 말씀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더우기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특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한다. 원어로는 킹제임스역 처럼 '죽기까지 신실하라'인데 즉 죽기까지 믿음을 잃지 말것을 명하신다. 이러한 말씀이 가능한 것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의 삶이 더 영광스럽고 또한 영원하기 때문이다. 죽기까지 신실할 때 '생명의 관'을 받게 되는데, 역시 '생명'이다. 죽으면 그 아무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11절은 이기는 자에 대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시는데, 이 둘째 사망은 영적 사망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사망 즉 주님과 완전히 끊겨서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사망이다 (계 20:14). 이러한 해를 받지 않으려면 단지 '믿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으려면 정말 믿어야 한다. 계 20:6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하는데, 따라서 이 서머나 교회를 비롯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기는 자들은 천년 왕국 이전에 부활할 것임을 암시한다.
2:12-17
버가모 교회
'버가모'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어원이 '푸르고스' 즉 '탑' '요새화된 구조물' 등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본문 내용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페르'와 '가모스'라는 단어들을 나누어 보면 꽤나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되는데, '가모스'라는 말은 결혼을, 그리고 '페르'는 '~관하여, 통하여'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중 결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과 결혼하고 주님만 남편으로 모셔야 하지만, 세상과 아직도 분리되지 않고 계속 짝을 지어 사는 상태가 바로 이 '버가모'이다. 에베소에서 서머나의 고난을 통과하여 교회는 아마도 지치고 번아웃 됐는지 모른다. 또 동시에 콘스탄틴 세상 정권이 이제 교회를 용납하고 포용하시 시작했다. 로마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진리를 핍박했지만 후에는 아예 국교로 삼았다. 교회가 세상과 결혼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즉 교회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오해한 소위 '정교분리'라는 말인데, 이는 원래 '국교분리'로 번역되어야 했다. 영어로는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교회는 분명 세상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또 성경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수립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 아예 종교가 국교가 되어 버리면 문제가 된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친히 다스리시지 않는 이상 교회가 권력을 휘두르면 타락하게 된다. 하나님의 권위와 권력은 절대적이지만, 온전한 하나님 왕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성도들은 이 땅에서 먼저 고난을 당해야 한다.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절대권력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가모 교회 처럼 교회와 세상이 결혼한 상태에 대해 계시되는 주님의 모습은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12절)' 시다. 보통 '검'은 찌르는 것이고 '도'는 자르는 것이지만, 좌우에 날이 서있는 검인 경우는 자를 수도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상과 분리하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말씀이신 주님은 그의 백성을 하나로 만드시기도 하시지만, 경우에 따라 분리하시는데, 말씀으로 찌르고 쪼개시며 자르신다 (히 4:12). 세상과 결혼해서 그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 같아 보여도 버가모 교회는 분명히 교회였고 그래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사탄의 권좌'가 있는 큰 조직이 되어 버렸는데, 그 가운데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이라는 말은 환경적으로나 혹은 조직적으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생명이 중시되는 곳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교권주의적인 모습이 부각됨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충성된 증인이 높임을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이 '안디바'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한데, 많은 경우 역사적인 어떤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안티'와 '파테르(아버지)'의 합성어로 설명하지만, 이 이름의 의미는 '안티'라는 말과 '파스'라는 말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대적하다'라는 의미이다. 교회가 더 이상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종교로 타락할 때, 그리고 세상과 연합해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러한 모습이 소위 '대세'가 될 때 믿는 이들 가운데 그 '대세' 곧 '모든 것을 대적하는' 이가 바로 참된 증인이다.
버가모에 위치한 교회 즉 참으로 믿는 이들은 이러한 증인의 죽음을 목도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는데, 이 '책망'은 앞 에베소와 마찬가지로 '카타' 즉 '대적'을 말한다 (anti 보다는 약한 개념). 두가지를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니골라들의 교훈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둘은 다른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는데, '발람의 교훈'은 그 근원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즉 우상과 하나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행음 즉 육체적이고 성적인 타락이다. 음행이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을 잃게 하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말씀을 받을 수 없게 한다. 즉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결국 성령에 충만하게 하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게 한다. 그래서 왕이며 제사장으로서 부르심 받은 그 부르심에 따라 살지 못하고 단지 종교 생활에 의지하여 '니골라들의 교훈' 즉 '위에 있는' 사제들의 인도를 무분별하게 따르는 편리한 교권주의를 택하게 된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 (갈 5:13)'는데, 이 자유는 죄와 나의 자아와 마귀와 세상과 종교에 대한 자유다. 그 어느 하나라도 묶이게 되면 참으로 자유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 문제있는 이들에 대해 속히 가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을 말씀하시지만, 회개를 종용하는 대상은 버가모 교회이다. 이것은 문제있는 이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바로 '교회' 가운데 그나마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는 의미다. 즉 회개는 문제있는 이들이 먼저가 아니라 그들을 바로 이끌며 주님을 떠나게 하는 교훈을 대적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먼저 요구된다. 이것은 주님을 처음 믿을 때 요구되는 회개 즉 회심과는 다르며, 구원받은 후 생활면에 나타나는 죄들 혹은 실수들에 대한 회개다.
17절도 동일하게 '교회들' 즉 이 버가모 교회 역시 역사적으로 사라진 교회로 볼 때, 지금도 주님의 말씀과 그 교훈은 오늘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역사적인 교회는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기는 자 (혹은 정복하는 자)에게 주는 상이 '감추었던 그 만나'와 '흰 돌'인데, 과거 구약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나타나고 모두가 먹은 것이었지만 이 '그 만나'는 이제까지 숨겨졌던 것이다. 구약의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지만 (요 6:49), 이 '그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새로운 것으로 보인다. 또 이 '흰 돌'도 흥미로운데, '돌'이라는 말이 신약에 많이 나오지만, 이 '돌 (프세뽀스)'는 '작은 조약돌' 정도로 과거 대제사장이 가슴에 품었던 우림과 둠밈을 암시하는 듯 하다. '흰'것은 정결함 즉 성도의 정체성을 의미하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권리 혹은 권세를 의미한다. 신약에는 여기와 더불어 같은 단어가 행 26:10에만 나오는데 거기에는 '투표'로 번역되었다. 즉 이것은 돌을 던져 투표하는 혹은 우림과 둠밈 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기는 자가 새로 오는 영원한 왕국에서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권리는 자유자에게만 주어진다.
2:18-29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부터 역사적으로 주님 재림 때까지 존재하는 교회 형태를 보여주는데, 25절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여러 이교도적인 요소들과 비밀스러운 것들이 교회로 침투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연상된다.
'두아디라'라는 말은 '희생' 혹은 '희생제물' 혹은 그 외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나 유래를 찾기 쉽지 않다. '우상의 제물'이라는 말 처럼 여러 이교도적인 것들과 연관된 것, 그리고 소위 '마녀 사냥'이라는 것들이 두루 행해졌던 점 등이 연상된다. 18절은 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계시된 주님의 모습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에 여러 불순물이 들어오고 오염되었기 때문에 분별하시는 불꽃 같은 눈과, '빛난 (혹은 정제된) 주석' 즉 동을 정제하기 위해 여러번 불을 통과해야 하듯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오염으로부터 정결케 되기를 요구하시는 모습이다. 더우기 이때는 소위 '암흑시대'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19절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개역개정역은 번역했는데 '사업'은 '행위'와 동일한 '에르곤'이다. (이러한 오역이 개역개정의 치명적인 문제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2절)' 그리고 3절 내용 등으로 칭찬하셨지만,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는 그내용이 훨씬 더 많은데 '네 행위와 사랑과 섬김과 믿음과 네 인내'가 있고, 또 '나중 행위가 처음 보다 더 많다 (혹은 더 크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믿음'이 먼저고 '행위'는 그에 따르는 것이라 배웠고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는 물론 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도 '행위'를 먼저 말씀하신 것 뿐만 아니라 역시 '행위'로 마치신다. 행위와 믿음은 분리할 수 없다.
이 두아디라 교회를 대게 로마 카톨릭으로 해석하는데, 그러면 19절의 칭찬은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로마 카톨릭 내에 이제는 교리적으로 성경적 진리와는 빗나간 것들이 많지만 초기 기독교의 기본 핵심 교리를 세웠고,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유일했던 기독교 교회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와 함께 혹은 그 이전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콥트 교회나 네스토리안 등 여러 형태의 교회들과 순수한 믿음을 추구했던 알지 못하는 공동체들이 공존했었지만). 그래서 어떤 모양이든 그 '행위들 (원어 복수)'은 적지 않았고 또한 그 아가페 사랑은 물론, 믿음이며 인내 또한 주님께서 인정하신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천주교에도 구원이 분명 있다고 믿는 것이다) 더우기 흥미로운 것은 7개 교회 중에 이 '두아디라'는 단어만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하나이지만 당시 소위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로마카톨릭외에 역사적으로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존재했던 여러 신앙공동체들과 영적 거인들이 이룬 성과들에 대한 칭찬을 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주교에는 이렇게 일반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있는 반면 또 한면으로는 '사탄의 깊음들 (24절)'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는 사탄의 더 깊은 것들이 끼어들고, 반대로 죄가 충만한 곳에 더욱 은혜도 넘친다. 그래서 분별의 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 대해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는데, 먼저 '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이세벨은 구약의 인물이지만 이제 '교회'라고 하는 것 안에 꽤나 큰 세력으로 나타난 어떤 것인데, 그에게 '자칭 선지자'라는 권위가 있어서 가르치고 꾀고, 결론적으로 행음하게 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 과거 천주교는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성경을 간수했지만, 그 세력이 커지면서 이교도들과 혼합하고 결론적으로 교리도 혼잡하게 변해버렸다. 이 이세벨은 교회 내의 영향력있는 존재 혹은 조직이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이렇게 배교한 소위 '리더십'들이나 조직 혹은 시스템에 대해 '용납'할 수도 혹은 대적할 수도 있는 권위가 있다 (20절).
주님의 은혜는 이러한 이세벨이라는 막강한 세력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녀는 회개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주님께서는 그녀를 '침상에 던질 터'인데, 이 '침상'은 '클리네이'라는 말로 '우리말성경' 처럼 '병상'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 세력이 약화될 것을 말씀하는데,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2)' 또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실 것이다 (23절). 역사적으로 정치력을 갈망하고 또 과시하며 여러 정세에 간섭하려 했던 로마 카톨릭은 그 세력이 막강했던 때도 있었지만 과거 그 화려한 세력에 비해 어느 순간 그가 권세를 부리던 여러 국가들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또한 그러할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 그리고 '그녀의 자녀들'을 언급하는 것인데,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여러 열강은 물론 교리적으로 배교하는 '교회'들을 말하며 이들은 '큰 화난 가운데에 던'져지고 (22절), 특히 '그녀의 자녀들'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로마 카톨릭의 모습은 물론이고 종교개혁을 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로마 카톨릭을 그대로 답습하는 여러 기독교 교파들의 모습들이 오버랩된다. 결국 이들은 죽임을 당할 것인데 (23절) 이 죽음이라는 말은 결국 그들의 존재가 피폐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물론, 영적인 죽임 즉 사망을 당할 것을 말씀하는 것 같다. 배교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판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나 사이즈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이심을 보여준다.
24절의 '남아 있어' 혹은 '남은 자들'은 '그 외의 사람들' 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두아디라라는 존재 속에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한 이들은 바로 그 외의 사람들이고 이들은 주님과 참으로 교제하는 이들로서 '사탄의 깊음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 '알다'는 '기노스코'로서 남녀의 성관계를 말할 때도 쓰는 단어로 깊은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두아디라 '교회' 내에서는 이렇게 사탄의 깊음을 알게 된 사람들 즉 사탄과 하나가 된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로마 카톨릭에는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모르는 평범한 성도들은 '다른 짐'들로 부터는 해방되는데, 이 '짐'은 문자적으로 '무게'를 의미한다. '사탄의 깊음들'을 아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짐이고 '무게'다. 우리는 '사탄의 깊음들'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는 '주님'을 알아야 한다.
25절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명하시는데, '다만'으로 번역된 단어는 '어쨌든'을 의미하는 πλήν이라는 말이다. 즉 어쨋거나 남아 있어서 소유한 것을 굳게 잡아야 하며, 이것은 정제된 신앙의 핵심을 의미한다. 많은 것을 소유한다해도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오직 '너희가 소유한 것'임을 말씀한다. 이 '것'은 정관사 단수로서 오직 '하나'를 의미하는데, 그러한 것을 주님 오시기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 교묘하고 깊은 것들이 존재하는 로마 카톨릭 안에서는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약속 역시 작지 않은데, 26절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라고 말씀한다. '내 일'은 '내 행위'로 주께서 인정하시는 우리의 '행위'는 주님의 그것과 같아야 하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우리의 행위는 주님의 행위가 됨을 말씀한다. 그럴 때 이기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되는데, 27절은 그러한 권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을 것을 말씀한다. 소위 '철권정치'인데, 세상 정치력을 탐하고 결탁하려는 로마 카톨릭의 어떠함을 이기는 자는 바로 진정한 정권을 얻을 것을 말씀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스리다 (포이마이노)'라는 말은 동시에 '목양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는데, 그래서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말씀한다. 28절은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 '새벽 별'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서 '그 새벽 별'이고 이는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계 22:16). 로마 카톨릭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 교회로서 정체성은 주님께서 아끼시며 사랑하심을 본다. 그 안의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면 안되겠지만 그렇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기는 이들은 주님 자신을 소유하게 된다. 주님의 행위, 주님의 권세, 그리고 주님 자신을 얻는 것이 바로 이기는 자들이 누릴 것이다.
3:1-6
사데교회
비교적 짧은 사데 교회에 대한 말씀이다. '사데'라는 말은 '남은 자'를 의미한다고는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이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신 모습은 에베소 교회와 비슷해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다. 에베소 교회에는 언급하지 않은 '일곱 영들'을 말씀하시는데, 5:6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이 말은 원어에 없음)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기록하며 이 일곱 영들의 정체가 주님의 눈이고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 눈은 보는 것이고 이 일곱이 온 땅에 보내졌다는 것은 바로 이 사데 교회가 어떤 형태로든 온 땅에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로 본다.
이 사데 교회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개혁한 교회인데, 어쩌면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하던 교회다.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개혁의 불을 밝혀왔지만, 문제는 이러한 시도와 그 근본 이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카톨릭의 혼합된 더러운 것을 대적해서 깨끗한 교리를 추구했고, 소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등을 외쳤지만, 이미 아성을 구축한 로마카톨릭을 대적하려니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오직 은혜'나 '오직 믿음'이라는 오용된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네 믿음을 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시 '네 행위를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설명하신다. 즉 유명무실, 명목상의 교회라는 것이다.
로마카톨릭이 세상과 결혼하고 많이 타협한 것 같지만 개신교 역시 만만치 않은데, 정말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할 수 없는 혹은 할 필요 없는 것들을 교회 사업의 명목으로 너무 많이들 해왔다. 즉 분별없이 잠자고 있던 것인데, 그래서 2절은 먼저 '깨어라 (혹은 보아라)'고 명하신다. 소위 교회 '부흥'이 정말 부흥인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혹시 교회가 속된 말로 연애당이 되지는 않았는지, 공연장으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소위 '성직자'만 먹여 살리는 종교 집단이 되지는 않았는지, 개혁이라는 말은 난무하지만 현실에서는 하나도 개혁의 열매가 없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매우 매서운 평을 하신다.
처음 개혁 당시 그 막강해 보이던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는 잘했었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로마 카톨릭과는 무늬만 다른 또 다른 '성직자 계급'을 양산해서 니골라당의 어떠함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그래서 3절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즉 개혁의 처음 정신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재림을 외쳐도 (사실 이제는 많은 교회에서 더 이상 재림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지만) 주님의 재림은 도둑 같이 임할 것이다.
다행히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말씀하시는데, 뒤집어 보면 사데 교회 대부분 사람들은 '그 옷을 더럽'혔다는 말이 된다. 왜 개신교는 '그 옷을 더럽'혔을까? 이것은 다시 '행위' 문제인데, 종교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주일 사는 삶과 주중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18절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흰 옷을 사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흰 옷'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사야 하는 것을 말씀한다. 사데 교회 초기에는 순교도 하고 많은 환란이 있었지만 신교가 세력을 막강히 키운 뒤로는 오히려 카톨릭 세력을 능가하는 동시에 맘대로 교파들이 나뉘어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기 보다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들을 골라 입고, 다른 옷을 입은 교파에 대해 적대시 하며, 동일한 성경으로부터 온 타교파들의 교리와 진리를 모함했다 (예를 들어 칼빈주의 대 알미니안주의, 혹은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잃을 수 있는가 등).
4절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는데, '몇 명'은 원어로 '몇 이름 (혹은 명성)'을 의미한다. 종교 개혁을 이끈 몇 명은 그들의 목숨을 걸고 개혁을 이루었지만 후에 그들의 교훈을 받은 이들은 그대로 따라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칼빈의 경우, 그는 안수를 받지도 않았고 더우기 목사도 아니었지만 후세에는 '정통' 운운하며 안수받지 않으면 무시하고 이단시 하는 풍조까지 생기고 이것을 당연히 여긴다. 교회 내에서 섬기는 '리더들'은 필요하지만 '성직자'라는 소위 '평신도' 위에 위치하는 이들은 필요하지 않다. 정말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할 때다.
이렇게 칭찬없이 죽은 자라는 평을 받은 사데 교회임에도 그들이 교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가운데 '이기는 자 (혹은 정복하고 있는 자)'를 부르시는데, 그에 대해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흰 옷'은 다시 말해 '착한 행실'인데, 자선 사업 같은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4절에 '나와 함께 다니리니'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하는데,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 15:5).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착한 행실'이고 '흰 옷'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기는 자'는 단수지만 3장의 '흰 옷'은 모두 복수 즉 '흰 옷들'이다. 이는 다시 '네 행위'의 '행위'가 복수인 것을 보며 이 둘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계 7:13은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흰 옷'의 '옷'은 '스톨라'로서 '예복'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마 21:11-12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흰 예복'은 혼인집 주인이 주는 것이지만, 그 예복을 '씻어 희게 하'는 것은 다시 말해 '행위'다. 이렇게 믿음과 행위는 함께 간다.
3:7-13
빌라델비아 교회
책망없이 칭찬만 있는 빌라델비아교회다. 먼저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형제사랑'이다. 교회 내에 모두가 형제이며 계급이 없고 그 안에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공동체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philos'인데 이 말은 친구나 형제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는 먼저 하나님과 이웃을 아가페 할 때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형제'의 헬라어는 '아델포'인데, '같은 자궁'이라는 의미로서, 종교조직의 '멤버들'이 아니라 주님 주신 동일한 '생명'으로 하나가 된 형제들이다. 성숙도에서는 차이가 있고, 형제로서의 서열은 존재할 수 있지만 계급은 없다. 따라서 호칭도 '목사, 장로, 집사'등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기능은 있지만 그런 말로 부르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말씀은 신약에는 없지만 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앞 20절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 그리고 21절은 '정권'을, 23절은 '영화로운 왕좌' 24절은 '모든 영광' 등을 말씀하는데, 이 '다윗의 열쇠'는 과거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정권과 왕좌 그리고 영광과 관련있다.
'형제 사랑'을 하는 그들에게 '왕좌'를 말씀하시는데, 지난 2:26 두아디라 교회 이기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을 약속하시지만, 이 '다스리다'는 '목양하다'와 같은 단어에 비해, 이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권력을 언급하시지는 않지만 결국 '다윗의 열쇠'는 '정권'을 암시하며 이는 '영원한' 즉 하나님의 정사를 의미한다. 이 '열쇠'는 문자적으로는 '자물쇠'인데 따라서 무언가를 제어하는 권력을 말하고, 8절은 특히 '열린 문'을 말씀하는데, 이와 비슷한 말은 골 4:3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빌라델피아 교회는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다. 구약에도 이런 비슷한 말씀은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열린 '하늘 문'을 통해 복을 부으신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이 '열린 문'은 '양의 문'되신 그리스도시다. 헬라어로 이 '문'은 'thura'인데, 영어 through와 비슷한, 즉 '통하는' 것이다. 이 문을 '통해' 즉 '들어오며 나오며 (요 10:9, 원어참조)' 우리는 복을 받고 누리며 또한 전한다.
주님께서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떠한 모습인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첫째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행위'를 말씀하며, 특히 '작은 능력'을 언급하시는데, 따라서 빌라델비아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다. 대형교회가 되면 이제 더 이상 빌라델비아 교회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능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능력이 작았음에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능력이 커지면 주님 보다는 그 능력을 의지하기 쉬운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이 말씀은 '나의 인내의 말씀'인데 (10절), '우리'의 인내가 아니라 주님의 인내다. 인내 또한 주님과 동행할 때 가능하다.
흥미로운 것은 다시 '사탄의 회당'을 말씀하시는데 이들이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따르는 이들인데, 이들은 정작 메시야이신 주님을 부인하고 거역하며 죽였다. 유대인 혹은 이스라엘을 민족 혹은 혈연 공동체로 이해할 때가 많지만, 실은 언약 공동체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 3:9에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들을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는 말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폭로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들 중 몇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버가모나 사데교회는 세상과 벗한 교회이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난 교회들이고 뉴스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따라서 여러 정치 세력이나 경제를 거머쥐고 있는 세력들과 짝한 교회들이지만, 그러한 것이 전혀 없이 오직 주의 말씀을 지키고 형제를 사랑하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세에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인들 몇을 주어서 절하게 즉 문자적으로 '경배' 혹은 '예배'하게 (헬 프로스쿠네오) 할 것이라 약속하는 것이다.
'절' 혹은 '경배'는 오직 주님께 하는 것이지만 이 능력 작은 교회에 대해 세상 권력자들 중 몇이 '경배'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참된 주님의 교회는 주님과 동등함을 보여준다. 즉 이 말씀은 교회 안의 몇몇 '사람' 즉 리더들 등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력층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다시 말해 주님께서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는 것인데, 이러한 것을 우리는 뉴스 등을 통해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만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10절은 다소 두려운 말씀인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라고 하시며 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즉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는 '면하다'는 말씀이 없는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를 온전히 통과하기 때문에 또 다른 시험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에 비해 주님 재림 때에 존속하는 버가모 사데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들은 이러한 시험의 때를 통과할 것임을 암시한다. 문자적으로 이 '시험'은 '환난'과는 다른 말이며 '면하다 tereo'라는 말도 '면제하다'라는 의미보다는 '그 시험의 때 밖으로 너를 지킬 것이다' 즉 '지키다'의 의미다. 하지만 결국 그 암시하는 바는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1절은 '내가 속히 오고 있다' 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신다. 즉 현재 존재하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재림하고 계심을 말씀한다. 그리고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시는데, 이 '가진 것'은 앞서 말한 '작은 능력'이다. 작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능력이며, 이 능력은 교회로 인내하게 하고 선교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12절은 정말 놀라운 말씀인데,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한다. 기둥은 건물에서 결코 뺄 수 없는 구조물인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바로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특히 이기는 자 '위 ep'에 '하나님의 이름...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세상 통치자나 타락한 종교 등은 자신을 일컬어 '천자' 혹은 불경스럽게도 자칭 하나님이라 칭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 (계 17:3)'로 자신을 두르지만,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 특히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기록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후에 이 이기는 자는 세상이 볼 때 하나님 같을 것이다!
3:14-22
라오디게아 교회
책망만 받았다는 라오디게아 교회 차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면을 본다. 우선 일곱 교회에 대해 명하시면서 처음에 언급되는 에베소 교회를 제외하고는 원어에 모두 kai 즉 '그리고'로 시작한다. 이렇게 '그리고'를 제대로 번역한 번역본은 영번역판들 조차 그리 많지 않은데, 한글 번역판들은 모두 이 부분을 간과했다. 이 kai가 중요한 것은 일곱 교회가 모두 서로 다른 지역의 다른 모습의 교회들이고 장단점이 있지만 모두 주님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그리고 (혹은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로 시작된다. 이 문제 많은 교회도 주님은 빠뜨리지 않으셨고, 특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라고 말씀하시며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주의 몸임을 밝히신다. 이 '라오디게아'라는 말은 'laos 백성'와 'dike 정의'의 합성어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과 말씀에 의해 정의가 서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소위 '상식'에 의해 결정하는 교회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해 자신을 '그 아멘, 그 증인, 그 신실한 그리고 참된, 그 하나님의 그 창조의 그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지막에 언급된 교회이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자세히 아는 교회일 것이고 그 축적한 지식 또한 풍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와 같이 계시하신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 역사나 기독교 역사는 매우 단편적이고 불완전한데, 따라서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실하게 이끌어 오시는 많은 면들을 놓치게 된다. 주님께서는 앞서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에는 단지 '그 시작'이라고만 하시는데, 그 '마침'은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맡기시고 기대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21절에서 이 교회의 이기는 자에 대해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말씀하시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마침'이다. '마지막'이 아니라 '마침' 즉 완성인데 1장 8절에서 '시작과 마침 (원어 참조)'에서 쓰인 telos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배운 지식과 역사와 경험했던 것들에 따라 즉 '백성의 정의'에 따라 행했기 때문에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행위'를 말씀하시며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뜨겁거나 차다는 의미는 19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열심'의 어원이 '뜨겁다'이기 때문이고, '회개'는 냉철하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 문제인데, 이 교회는 그 모든 행위의 기준이 주님이 아님을 폭로하시며 그 결과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에 대해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하는, 즉 세상의 빛으로서 밝음과 어두움을 분별해야 하는 교회가 두리뭉실 기준을 흐리며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진리를 상황이나 '흑백논리'의 부당성을 들어 '백성'들이 좋아하도록 미지근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회 안에 계급제도를 가져오는 '니골라들'도 문제지만, 너무 '회중적'인 교회가 되버리면 기준이 흔들린다. 그래서 교회에서 '다스리는 (혹은 섬기며 목양하는)' 이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장로들이 되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를 통해 기독교 지식을 포함한 많은 지식을 축적하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17절)'라고 말한다. 사실 현재 여러 기독교 출판물과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은 마치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부자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값을 지불하며 고난을 통해 나 자신과 연합한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얄팍한 피상적 지식, 내 밖에 존재하는 지식이다. 교회 내에 여러 프로그램들과 제자 훈련 등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거나 영적으로 부요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프로그램 수료증은 나 자신의 참된 영적 상태와 성숙함을 속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는 날선 검처럼 비판하지 않으시고 '권하'신다 (18절)'. 이 '권하다 sumbouleou'라는 말은 '조언하다'라는 의미인데, 앞에 '함께 sun'이 있어서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지시가 아니라 '함께 상의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자신들의 참된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신랄한 비판 대신에 '함께 상의해 보자꾸나' 라고 말씀하신다. 흥미로운 것은 '내게서 .. 사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원어에는 '사다'는 말이 한번 나옴), 이러한 '불로 연단한 금'이나 '흰 옷' 그리고 '안약' 등을 값을 지불하고 사야 하며, 그 구매처는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여기 '내게서'는 'par emou' 즉 para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 단어는 '~로 부터, 함께'를 의미한다. 이것은 '교제'를 의미하는데, ek를 쓰지 않고 para를 쓴 것은 이러한 것들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낼 때 가능하다는 의미다.
또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의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philos' 즉 친밀하고 현실적인 교제다. 이러한 친밀한 교제를 위해 '책망하여 징계하'신다. 그리고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며 더우기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20절은 말씀한다. 자신의 지식이 풍부하다고 여기는 이 교만한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함께 먹는' 친밀한 교제 안으로 초청하신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하라'는 명령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18절은 '권한다'라는 말씀이고, 원어로는 명령어가 단지 19절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리고 20절 '보라'가 전부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는 헛된 것에 열심일 때가 많다. 그리고 열심이 있다 해도 회개와 함께 하지 않는다. 정말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교회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를 부르신다. 특히 '보좌 thronos (영어 throne의 어원)'를 말씀하시는데, 신약에 63번 나오는 이 단어는 왕국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 5회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계시록에 48회 즉 대부분 이 책에 기록되었다. 주님을 떠난 지식을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대가를 지불함으로 진정 부요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보좌에 참예할 수 있다.
4장
이제까지 내용이 이해하기 만만치 않다면 4장 내용은 더욱 인간의 상식으로는 황당하게 들리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는데, 먼저 1:10 처럼 '영 안에' 있을 때이다. 요한은 다시 '곧 영 안에 있게 되었는데 (원어 참조, 2절)'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육신의 어떠한 것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모든 계시들은 '하늘'에서 보았는데, 1절은 '이리로 (하늘) 올라오라'는 말씀에 따라 2절 요한은 '영 안에 있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4장의 '하늘' 즉 1절과 2절의 이 '우라노'는 모두 단수인데, 보통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하늘'은 복수 즉 '하늘들'이지만, 여기에는 모두 단수로 쓰였다. 그 이유는 이 '하늘'은 소위 삼층천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오직 '영 안에 있을' 때 볼 수 있는 바로 그 곳 (정관사 호 우라노) 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아직도 밧모 섬에 갇혀있고 늙은 몸의 요한이지만, 영 안에 있을 때 그는 하늘로 인도되었고 모든 것을 초월해서 주님의 거룩하심과 그 권능을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 앞에 '하늘에 열린 문이 있'었는데, 3:8의 '열린 문'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것이지만 이제 그가 영 안에 있을 때 듣기만 했던 열린 문을 보았다. 요한의 때는 아직 빌라델비아 교회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였지만 (물론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했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존재 했었지만) 영 안에 있게 될 때 그는 미리 열린 문을 보았고 그 문을 통해 주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 갔다.
그 보좌와 주위에 대한 언급은 이 세상의 어떠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에 '~같더라'고만 말하지만 그가 본 것은 과거 구약에 잠간 비춰진 하나님의 보좌와 비슷한데, 놀라운 것은 8절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고 고백하고 창화하는 것이다. 과거 이사야가 본 이상에서는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사 6:3)'로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가 추가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신데, 이 분은 과거 구약시대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지만, '장차 오실 이 (원어로는 지금 오고 계시는 이)'시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말씀하는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바로 영 안에 있고 하늘에 있다. 현실을 살지만, 진정한 현실 (진리, 알레떼이아)은 바로 영 안의 하늘이다. 오늘도 주님은 다스리신다.
11절을 원어로 직역하면 '합당하십니다 (당신은) 오 주여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시여, 그 영광을 그리고 그 존귀를 그리고 그 능력을 받을 받으시기에! 당신께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의 그 뜻을 통하여 (그것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창조됩니다'다'정도가 된다. 하나님 그리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는 그 창조하신 것들을 언제고 멸하실 수 있지만 이제까지 주님의 뜻을 통해 만물은 존재해 왔던 것 즉 이어져 왔던 것이며 또 창조되는데, 여기 창조되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여서 단순히 과거만을 말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새롭게 창조를 하고 계시기도 하다.
5장 일곱 인 개봉 시작
이번 장은 한글킹제임스역 보다는 우리말 성경이 보다 잘 번역한 것 같다. 특히 5절을 킹제임스는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번역했지만 '사람'이라는 말은 원어에 없고, 영어 킹제임스역에도 단지 one of the elders 라고 되어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이 24장로들이 인간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쓴 관은 금관이었는데, 사람에게 금관을 주시리라 약속하신 말씀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금관'이라는 말은 성경 여기에만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4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인데,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안과 밖으로 기록된 두루마리 즉 책을 가진 것을 보았다. 두루마리는 기록한 후에 둘둘 말아놓은 후 풀리지 않게 인으로 봉했는데 일곱이나 봉했다. 즉 이것은 그 내용이 비밀이라는 의미였고, 따라서 요한은 아무도 그 일곱 인을 뗄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을 보고 크게 울었다. 그것이 뭐라고 그는 크게 울었을까?
구약에 등장하는 두루마리는 대개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인데 단지 과거를 기록한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것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것들이 적지 않다 (렘 36, 겔 3 등) 특히 단 12:4은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기록하는데, 이 '봉함하라'가 '인'과 동일한 단어다. 또한 12:6은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고 하는데 결국 이 두루마리는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자 요한은 크게 울었을 것이다.
계시록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계속해서 '영'과 '하늘'이 그 배경이기 때문에 3차원에 익숙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에 입각해서 이해하려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많은 시제가 미래이기도 하지만 완료형도 적지 않고 아오리스트 시제 역시 자주 등장한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영 안에서 '보았지'만, 앞으로 이 땅에 일어날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 인들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이 등장하는데, 5절은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말하지만 정작 6절에는 '한 어린 양' 특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시기도 한 분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외형적인 모습으로 1-2장에 기록한 모습 외에도 어린 양이시며 또한 유대 지파의 사자이며 다윗의 뿌리이시다. 이 어린 양의 모습이 특이한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고, 그 일곱 눈은 앞서 말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 땅에 사실 때 너무도 평범하게 보였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그 분의 어떠하심을 모두 드러내심을 보여주는데, 이 땅에서 완성하신 모든 구속 사역이 하늘에서 증명되고 또한 증거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과 복음서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대해 기록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하늘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요한은 특별하게 이러한 것들을 보고 증거하고 기록할 자격을 받았다. 아마도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내용들과 비슷한 것들을 보았을 것 같은데, 고후 12:1-4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9절은 '그리고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취하고 그 인들을 여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는 당신이)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하나님께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들로부터 사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또 10절은 '그리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께 왕국과 제사장들이 되게 하시며 그들이 땅 위에서 다스릴 것입니다' 라고 기록한다.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고 그 피로 '하나님께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들로부터 (사람들을) 사셨는데, 그 목적은 그 구속된 이들이 '우리 하나님께 왕국과 제사장들이 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땅 위에서 다스릴 것'을 말한다. '나라'와 '왕국'은 다른 말인데, 우리를 주님의 '왕국' 삼으셨다는 것은 우리로 모두 왕 같이 만드셨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은 우리를 단지 죄에서 사함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왕국과 제사장들로 삼으시는 놀라운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살도록 부르심 받고 또한 연습한다.
'합당하다 axios'라는 말이 4번 나오는데 모두 '어린 양'을 가리키고 있다.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물론 경배하지만 11-12절은 만만 천천 천사들이 이 '어린 양'께 찬송하고 13절은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하고, 14절은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함을 기록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 어린 양이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사실 아직은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않고 있는데,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며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롬 8:19, 22는 기록하기 때문에 이 5장의 기록은 어쩌면 시간을 초월한 내용일 수 있다. 이것은 '영 안' 즉 3차원적인 이해와 안목을 초월해서 봐야 볼 수 있는 것이다.
6:1-8
두루마리의 일곱 인 가운데 처음 네 개를 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벌어질 특별한 사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되어 온 일이다. 따라서 이 두루마리의 인들은 이미 떼어지고 있고 또 열리고 있다.
성경의 문단을 나누어 부제를 달아놓는 번역본들이 적지 않은데, 예를 들어 두번째 말은 '전쟁', 세번째 말은 '기근', 네번째 말은 '죽음' 등으로 설명이 되어 있지만 첫번째 흰말에 대해서는 정확히 부제가 적혀있지 않고 다만 '첫째 인: 흰 말과 그 탄 자' 정도로 되어 있는 번역본들이 많다. 그 이유는 그 첫째 말의 색이 '흰 색'이고 이와 동일한 '백마 (원어 히포스 ㄹ루코스로 동일)'라는 말이 계 19:11와 14에 주님을 나타내는 단어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복음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그 외 다른 의견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거짓 복음 혹은 진리를 거스르는 여러 거짓말과 종교들이라고 보는 것은, 일곱 인들이 떼어질 때의 첫째이며 또한 이어지는 다른 말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탄 자'가 활을 소유한 것은 능동태로 되어 있지만 관을 받은 것은 수동태로 되어 있다. 만일 복음이라면 같은 태로 쓰여졌어야 할 것이다.
네 가지 말들이 각 인들을 뗄 때 앞서 기록했던 하늘의 네 짐승이 한번 씩 '오라'하는 명령으로 각기 등장하는데, 첫째 말은 흰 말이다. 흰 색은 순결하고 깨끗한 이미지이며 따라서 외형으로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전쟁을 해도 먼저 첩보전을 해서 여론을 움직이면 승리하기 쉬운데, 이렇게 속이는 것이 먼저 등장한다. 이미 복음은 선포되었고 진리는 만방에 전파되었지만,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보다는 소문이나 가짜뉴스 (프로파간다 같은) 그리고 여러 종류의 종교들에 미혹된다. 복음을 부인하고 다른 것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안타깝지만 심판만 있다. '그 탄 자가 활을 가졌'는데, '칼'이 아니라 '활'이다. 주님께서는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 처럼 심판의 말씀이 나오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이들은 칼을 사용하고, 이렇게 진리를 거스러 미혹하게 하는 이들은 '활' 즉 멀리 쏘는, 마치 뉴스나 소문이 멀리 가는 것 처럼 활로써 사람들을 맞춘다. 또한 '관'을 받았는데, 이 관은 권세나 권력을 의미해서 그러한 권세로 사람들을 움직임을 말한다. 이 흰 말 탄자는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 심판의 시작이다.
둘째 말은 붉은데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한다. 즉 전쟁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큰 칼'은 앞으로 매우 큰 전쟁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여러 이유들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지만 현재는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연구 되었는데, 따라서 앞으로의 전쟁은 경제 문제 아니면 종교적 혹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갈등으로 야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말은 검은 말로서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고, 음성이 있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즉 하루 일해도 양식이 부족하다는 의미이며 그 외 필요한 것은 따로 구입할 수 없는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어도 기름과 포도주 즉 소위 럭져리한 식품들은 계속 생산되며 유통된다. 이것 또한 경제적으로 기근을 부추긴다.
마지막으로 청황색 말인데 이 '청황색'은 누리끼리한 녹색으로 사람이 죽으면 검푸르게 변하는 색을 말한다.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라고 하는데,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고 한다. 이 둘 모두 인격으로 표현했는데, 따라서 이 둘은 후에 모두 불못으로 던져진다 (계 20:14). 이 '사망'과 사망 후에 혼들을 잡아두는 '음부'에게 '땅 사분의 일의 권세'가 주어졌는데, '검과 흉년(혹은 기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인다. 이 의인화된 '사망' 자체는 '검'이나 '기근' 혹은 '짐승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죽이는데, 그 가운데 '사망'은 '전염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데베르'와 연관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사람이 죽는 기본적 이유는 죄의 결과이지만 보통 전쟁이나 기근 그리고 병사 아니면 짐승들에 찢겨 죽는다. 흥미롭게도 여기에 불에 타 죽는 것이나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제외되었다.
6:9-17
9절에는 다섯째 인이 떼어지는데, 보통 주님을 믿은 영혼 (정확히 말해서 혼, 푸쉬케)은 죽으면 '낙원'에 간다고 말하지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제단 아래'에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시록에서는 처음 나오는 단어지만 계속해서 6번 정도 더 나오는데, 계시록 기록 연대와 문맥으로 보아 하늘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제단 아래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혼들이 있고 큰 소리로 언제쯤이나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실 것인지 탄원한다 (10절).
흥미로운 것은 보통 '주'를 '쿠리오'라는 단어로 쓰지만, 여기에는 '대주재 (데스포테스)'라는 말이 쓰였는데, 영어 depotism 이라는 말의 어원으로 '폭군, 군주, 전체정치' 등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그 정도로 이 '데스포테스'라는 말은 절대권력을 의미하는데, 이 땅에서는 폭력을 일삼는 절대군주들이 등장하지만, 하늘의 대주재는 왕의 왕이시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신실하게 증거를 지킨 이들에 대해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아직은 조금 참으라 하신다.
원어에서는 그들 각자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졌다' 즉 수동태로 나오는데, '두루마리'는 말씀이지만, '두루마기'는 '두루막다'에서 온 말로 긴 옷을 말하며 '예복'으로도 번역되었다. 원어로는 '스톨레 stole' 영어로는 robe 로 번역되었는데 앞서 기록된 '흰 옷'의 '옷'은 '히마타야'로 몸을 두르는 '천'에 가깝다. 그리고 '아직 잠시 동안 쉬라'고 '말해졌다 (역시 수동태)'. 왜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을까? 직접 말씀하시면 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아마도 이들은 '혼들'로서 몸이 아직은 부활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예복은 주어졌지만 아직 입을 수 있는 때 즉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쉬라)고 말해졌다'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정말이지 이렇게도 순교자들의 피를 원하시는 걸까? 순교하지 않으면 안식은 주어지지 않는걸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신실한 믿음을 지킨 자들 모두가 다 순교당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다니엘 처럼 천수를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을 역사적인 기록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12절 부터는 아직 역사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큰 사건들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내용은 여러 사건들을 시간별로 점진적으로 기록하기는 했지만, 매우 상징적이며 또한 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내용일 수 있다.
12절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를 기록하는데, '큰 지진'이 발생한다. 이 큰 지진 후에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같이 되는데, 아마도 그 정도로 해나 달의 모습에 영향을 줄만한 큰 지진일 것으로 생각된다. 즉 해나 달 자체가 검어지고 피같이 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지구상에서 관측되는 해나 달의 모습을 설명한다. 아마도 매우 거대한 화산활동이나 그에 따르는 지진 발생으로 인해 대기에 연기가 차서 해와 달의 모습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13절은 '하늘의 별들이.. 땅에 떨어지며' 라고 기록했는데, 물리학적 혹은 천체학적으로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는 없다. 이 또한 아마도 '별' 자체가 아니라 '별똥별'이 수 없이 땅에 떨어지거나 혹은 매우 큰 운석이 땅에 떨어져 큰 지진과 함께 땅에 변동을 가져오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아마도 지구를 둘러싼 수 많은 인공위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테슬라나 아마존 창업자 모두 각각 하늘에 만개가 넘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14절은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라고 기록하며, 여기 단수로 기록된 하늘은 천체를 가리키기 보다는 '대기권'을 말하며 이러한 대기권에 문제가 생길 때 아마도 저궤도 위성 궤도에 문제가 생겨 모두 땅에 떨어지고, 대기권이 얇아지기 때문에 중간에 타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모습도 연상할 수 있다. 이 때에는 창세기에 기록된 과거 큰 지각 변동 같은 또 다른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대기권의 변화인데, 남극의 빙하가 현재 많이 녹고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 빙하가 녹는 것이 당장에는 해수면 높이에는 그리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영구동토가스가 방출의 원인이 되는데, 가늠할 수 없는 양의 가스가 배출되면서 소위 온난화가 급속화하고 이에 따라 오존층이 파괴되며 대기권이 얇아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같은 일이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지매'와 동시에 일어나는데, 현재 아프리카 지각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아프리카 지각 구조는 지구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땅에 사는 사람들은 놀라서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하는데, 이 정도의 큰 혼란이 발생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자연재해'라고 하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 어린 양의 진노'라고 자백하는데,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몰라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말세에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물론 여러 매체를 통해 분명히 전해진다.
7:1-8
1절은 '이 일들 뒤에'라고 하며 6장 내용이 벌어진 후에 되어질 것들을 기록한다. 따라서 이미 대기권이 말려서 공기층이 매우 얇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즉 불어줄 바람이 없다. 이때부터 심판이 땅에 임하는데, 동쪽으로부터 올라오는 어떤 다른 천사는 하나님의 인을 가졌고, 또 다른 네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특히 이 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에 대해 '영해' 즉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요즘 문제가 되는 신천지도 그렇고 여러 이단들이 바로 이 숫자를 잘못 해석해서 그들만이 인침 받은 자들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우선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게 문자적 해석이 확실히 적용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영해가 필요하다. 특히 이렇게 사람들의 수를 영해하려 한다면 구약 민수기의 모든 지파나 사람들의 수 역시 영해되어야 하며 그러한 시도는 매우 이상한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계시록에 십사만 사천 이라는 말이 두번 나오는데, 하나는 바로 여기 7장이며 다른 하나는 14장이다. 분명한 것은 여기의 십사만 사천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인 우리는 적어도 여기 7장의 숫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이 2천년 전에 멸망해서 세계 전역에 흩어진 후 이들의 출신 지파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사실 자신들의 지파를 지속적으로 보존해 온 이들이 적지 않은데, 예를 들어 레위 지파는 제사를 담당하는 이들로서 현재 '칸' 혹은 '코헨' 등과 비슷한 발음의 성을 가진 이들이 그 후손들이다. 더우기 과학기술의 발달로 DNA 분석 등을 통해 자신의 속한 지파를 가늠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체적인 자각이 없다해도 하나님께서는 누가 어느 지파에 속한 것인지 모두 아시며, 따라서 천사가 그들에게 인을 친다. 이러한 내용은 단지 우리가 아멘으로 받으면 된다.
그렇다면 '인침'은 무슨 의미이고 이 이스라엘 백성 중 십사만 사천에 대한 인치심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침'은 '소유권' '권세' '보전' 등을 의미한다. 과거 주인이 종에게 인침으로 그의 소유가 되었고, 또한 어떤 문서나 사람에게 인침은 그 인친 사람 즉 왕이나 귀족의 권세를 나타냈으며, 그러한 인침받은 동물이나 사람은 안전을 보장받는다. 따라서 말세에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하기 전에 이렇게 특별한 인침을 이스라엘 각 지파가 받는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인침받은 이들 외에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문제다.
조금 더 묵상해보면 이 십사만 사천은 열두 지파에서 각기 만 이천을 합한 것인데, 원어로는 '144천' 그리고 '12천'이다. 이 '천 (칠리아스)'은 눈으로 대충 셀 수 있는 수이지만, '만 (무리아스)'은 '(눈으로는) 셀 수 없는' 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5:11에는 하늘의 천군천사가 '만만이요 천천' 즉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을 기록한다. 이 이스라엘 지파가 각각 '12천'이라는 것은 확실히 셀 수 있는, 즉 무언가 목적을 가진 숫자라는 의미다. 따라서 아마도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에 대한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천명 정도는 눈으로 대강 셀 수 있지만 '12천' 즉 만 이천 정도는 요한이 셀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수에 대해 그는 '들었다'고 증언한다 (4절). 흥미로운 것은 지파 순열이 구약과 다르고, 과거 에브라임이라는 말 대신에 '요셉' 지파가 되었으며, 단 지파는 제외된다. 단 지파가 제외된 것에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 지파가 이스라엘 땅에서 벗어나 멀리 옮겼기 때문에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방인들에게 흡수되었을 것이다).
'지파'라는 말이 여기 외에 계 21:12이 마지막이 되는데,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기록한다. 즉 이 십사만 사천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성도들이 아니라 온전히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과거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영원하기에 영원한 새 예루살렘 역시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진다. 다만 14절은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고도 기록한다. 이 열두 사도의 이름들 중에 가룟 출신 유다는 물론 제외될 것이지만, 맛디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이 채울지 궁금하다.
7:9-17 휴거에 대하여
9절은 다시 '이 일 뒤에' 라고 하며 앞 십사만 사천과는 별개의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있음을 기록한다. 앞서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말하는 것이지만 9절의 이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와 방언에서' 나온 이들 즉 이방인들이다. 이스라엘 중에 특별히 십사만 사천이 인침을 받지만, 그 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흰 예복을 입'은 즉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이들이다 (계 19:7).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계시록 19장까지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소위 환난을 겪지 않고 휴거된 이들이, 땅에는 대환난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하늘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아마도) 전통적인 해설에는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앞서 6:11에서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셨는데, 13절 역시 '흰 옷 (원어로 동일한 두루마기, 스톨라스)'을 말씀한다. 9절은 '이 일 후에'라고 하는데, 아마도 시간이 흘러 죽임당한 이들의 수가 찬 것으로 보인다. 6:11의 사람들과 7:9의 사람들이 동일할지는 모르지만 9절의 사람들은 6:11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장로 중 하나가 그들이 '그 큰 그 환난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자들 (현재진행형)'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인데, 그들에 대해 15절의 약속이 있지만 16-17절의 내용은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혹은 지금 살고 있는지) 증언한다.
16-17절은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역으로 말해 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주리고 목마르며 상하고 눈물 흘린' 것임을 말해준다. 소위 말하는 무시무시한 '대환난' 외에도 그들의 삶이 주님의 증거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장로는 설명한다.
8장 일곱째 봉인 개봉, 일곱 나팔 시작
지난 6장 여섯째 인을 떼실 때는 대홍수를 제외하면 역사상 전무하던 자연재해가 있을 것을 말씀하고, 아마도 그러한 자연재해로 인해 7장 처음은 온 땅에 바람이 불지 않을 것을 기록한다. 이때에도 많은 사상자가 있을 것 같지만, 그러한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 열 두 지파중 각 만 2천명씩 인을 받고, 환난 중에 큰 무리가 나온다.
8장은 일곱째 인을 떼시는 기록인데,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할 것을 말씀한다. 여기 '반 시간'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신약 여기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반'과 '시간 hora'의 합성어이다. 이 hora라는 단어는 어떤 '기간'을 의미하기 보다는 정확한 시각을 의미하는데, 신약에서 106번 쓰였고 항상 '시각'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계 12:14 한 때 반 때는 '카이로스' 즉 '하나님의 시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시각으로 30분 정도 하늘이 고요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7장은 잠간의 삽입부 내용이지만, 여섯째 인을 떼신 후에 정신없는 재해가 있고, 그러한 재해가 잠간 그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곧 땅 위에 정신없이 재앙이 내릴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2절부터는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이 등장하는데, 나팔 불기 전 재앙의 신호를 알리는 일이 3-5절에 기록된다. '금 향로'와 '많은 향'이 있는데, 지난 5:8에 '금 대접'과 '향'이라고 기록되어 이 '향'이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한 반면, 여기에는 '향로' 즉 libanotos 라는 말로 신약에 단 두번 여기에만 나온다. 5장의 금 대접에는 성도들의 기도들을 담았지만, 이제 여기는 그 기도들과 또한 향들을 올려 드리기 위함인데, 4절은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라고 기록한다. 흠정역은 '하나님 앞에서 위로 올라가는지라' 라고 번역했는데, 여기는 개역개정이 더 잘 번역했다. 하나님 보다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향연과 성도의 기도들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지만 이제 그 향로에는 대신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는데,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발생한다. 이 땅 위에 본격적으로 재앙이 임할 것을 알리는 신호다. 지난 6장 후반부에도 재앙이 기록됐고 아마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있었겠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땅 위에 사는 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재앙이 시작된다.
일곱 천사들의 나팔 부는 것은 시간적으로 매우 빠르게 즉각즉각 진행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 홍수가 그러했듯이 재앙이 임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거나 피할 수 없이 급하게 임한다. 가끔 산불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이 나팔들의 결과라고는 보이지 않는이유는 그 발생 빈도가 띠엄띠엄 비교적 여유롭기 때문이다.
앞서 7장 1절은 '바람이 불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6장 후반부의 기록처럼 대기권에 큰 변화가 있어서 일시적으로 갑자기 대기나 기후가 멈춰버린 것 같다. 그래서 1절은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다고 했지만, 이제 그 발란스가 깨어져서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발생 한 후,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졌다고 한다. '우박'과 '불'은 동시에 발생할 수 없는 것인데 따라서 같은 지역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우박이 내리는 곳도 있고 아니면 불이 쏟아지는 지역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연이라는 것이 너무도 오묘해서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도 전혀 없진 않다. 더욱이 이때는 대기권에 큰 변화가 생긴 후이다. 그 결과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다. '삼분의 일'이라는 말은 아마도 우박 보다는 불이 쏟아진 결과일 것이다. 이 '불'은 문자적인 가시적 화염일 수도 있지만, 오존 층의 파괴로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강력한 자외선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둘째 천사의 나팔은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거대한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아마도 핵미사일일 수도 있다.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라고 묘사한 것은 미사일의 노즐로 볼 수 있고, '던져지다 ballo'라는 말이 '던지다, 추진하다'라는 의미로, 현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포함한 장거리 미사일을 ballastic missile이라고 칭하는 것, 그리고 다음 셋째 천사 경우 처럼 '하늘에서' 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핵미사일에 더 가깝게 보인다. 바다에 떨어져서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는데, 핵탄두 하나로 이런 결과를 나을 수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방사능 오염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나팔 재앙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긴 시간 동안 벌어져 온 일로 해석할 수는 없는데, 이 둘째 천사의 나팔의 경우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 처럼 그 분명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핵탄두로 전체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이 핵탄두가 단지 핵이 아니라 중성자탄을 포함한 것이라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MOAB 즉 mother of all bombs라고 하는 하나의 발사체에 다수의 탄두 혹은 작은 미사일이 실려 있는 형태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이제 확실히 유성이나 혜성으로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데,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라고 한다. 이 유성은 큰데, 아마도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지구의 중력에 의해 쪼개어져서 여러 조각들이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강의 근원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아마도 강들이 많은 아시아와 창세기 네 강의 발원지인 중동 지방과 더불어 꽤 큰 지역에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유성은 보통 유성이 아니라 아마도 방사능 물질이나 그외 우리가 알 수 없는 독성을 가진 물질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그 이름이 '쓴 쑥 (11절)'이고 결과적으로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고 한다. 이 '쓴 쑥'이라는 말은 apsinthos인데 식물로서의 쑥이라고만 이해할 수 없다. 그보다는 마실 수 없는 쓴 물을 의미하는데, 성경 여기 한곳 11절에만 단 두번 나오며 그 어원을 찾을 수 없는 말로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을 보아 그 물의 상태가 쓰게 즉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지 물 자체가 식물인 쑥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 없이는 살 수 없기에 '많은 사람이 죽'는다. 흥미로운 것은 2029년 4월 13일에 아포피스라는 혜성이 지구에 근접할 것이라고 하는데,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2.7%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때에 비껴가더라도 지구의 중력으로 7년 후 다시 돌아올 때에는 충돌할 확률이 매우 커지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고 기록하는데, 해나 달이나 별 자체가 타격을 받았다기 보다는 앞서 떨어진 유성으로 인해 대기권에 먼지가 쌓이면서 천체의 빛이 삼분의 일로 줄어졌음을 '상대적'으로 관찰한 것으로 보인다.
13절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라는 말로 보아 아마도 주의 백성들 중 신실한 이들은 휴거가 된 상태가 아닐까 한다. 앞서 7:14에 이미 큰 환난이 있었는데, 이 '환난 thlipsis'은 성도들에 대해서만 쓰인 단어이며 앞으로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난은 '재앙'이며 '심판'이다. 이러한 심판은 지난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탄원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한데, 11절은 '잠시 동안'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8장은 비로소 그 심판이 시작된다.
9장
무저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계시록에만 7번 나오고 그 전에는 눅 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와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에서 나온다. 원어 '아부소스'는 '매우 깊은' 혹은 '바닥이 없는 (무저)'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 물질적인 공간인지 혹은 영적인 장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눅 8:31이나 계 20:3 등의 구절은 다이몬이나 사탄을 묶어두는 곳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영적인 공간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묘사는 꽤나 현실적일 수 있는데, 우선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별 하나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졌'다고 기록한다. 이 '하늘'은 단수로서 대기권을 벗어난 태양계 정도로 이해하며 거기에서 별, 아마도 행성이나 큰 유성 하나가 떨어져서 (막혀있던) 무저갱을 그 충격으로 열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그 별이 떨어지는 충격으로 무저갱이 열림과 동시에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라고 되어 있어서 앞서 8장 후반의 상황과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앞에는 해와 공기가 연기 때문에 어두워진다는 말은 없었지만 여기에는 확실하게 기록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 원본은 장절이 나뉘지 않았기 때문에 9장은 8장의 연속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연기 속에서 나오는 '황충' 혹은 '메뚜기'들인데, 이들은 무저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기 속에서 나온다. 즉 오염된 대기 속에서 어떤 곤충이 변종된 모습같이 나오는데, 이들은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에 대해서는 해를 주지 않지만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할 것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일반적인 곤충은 아닌듯 하다. 앞서 인침 받은 이스라엘 족속은 아직 이때 땅에 남아 있고 이들은 황충의 피해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는다.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진짜 곤충인지 아니면 유전자 조작으로 변형된 생물인지 혹은 어떤 전염병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고 다섯 달 동안 괴롭힌다. 다섯 달이라는 기간은 메뚜기 떼가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황충은 '쏘는' 힘이 있고, 그 괴롭게 함이 전갈이 쏘는 것 같은 즉 매우 큰 고통인데 '메뚜기'들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날개가 있어 (9절) 날아다니는, 즉 자연적인 메뚜기가 아니라면 공중이나 공기로 옮겨 다니며 해하는, 혹은 공기로 전염되는 매개체이다. 병리학에서는 airborne 즉 공기로 전염되는 것이 그리 많지 않고 있더라도 치명적인 병들은 아닌데, 만일 황충이 어떤 전염병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사람들은 피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라고 6절은 기록하는데, 원어로는 '사람들이 사망을 구해도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요, 죽는 (것을) 갈망해도 사망이 그들로부터 피할 것이다' 정도로 되어 있다. 이 '구하다'는 마 6:33 '너희는 먼저 그분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여라'와 마 7:7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등에 쓰인 말과 동일하다. 현재 먼저 주님의 왕국과 그 의를 구하지 않으면, 또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을 구하지 않으면 그 다섯달 동안 사람들은 사망을 구할 것이고 구해도 얻지 못하며 고통만 당할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은 이 땅의 모든 이들이 겪을 고통이다. 또한 '갈망하다'는 '에피뚜메오'로 정욕이 일듯 뜨겁게 갈망한다는 의미인데, 많은 때 '정욕' 혹은 '음욕'을 말할 때도 쓰였지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에서도 쓰였다. 그날 사망을 구하고 갈망하기 이전에 우리는 현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과 그 분의 의 즉 기준을 구하고 찾고 갈망해야 한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이 황충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소위 드론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연기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인공적인 어떤 것이 아닐 것도 같다. 11절은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고 하는데, 그들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왕 즉 그들을 다스리고 조종하는 존재가 있고 그는 바로 무저갱의 사자이며 이름이 아바돈 혹은 헬라어로 아폴루온인데 (아폴루미, 파괴가 어원), 둘 다 '파괴'를 의미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든 것을 부수는 것이다. '아바돈'이라는 이름은 욥기 31:12 '또 멸망에 이르도록 소멸시키는 불이니 그것이 내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으리라'에서 '멸망'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한다.
12절은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고 하는데, '첫째'는 '하나'로 바로 이 다섯째 천사의 나팔에 의한 화를 의미한다. 즉 이 황충의 화는 다섯달 동안만 임하는데, 일곱 중에 처음 넷을 함께 두고, 그 다음 셋을 또 다르게 두었다. 그 이유는 지난 8:13에서 '화로다 owe'라는 말이 셋 나오기 때문인데, 다섯째 나팔이 처음 화이고 이제 여섯과 일곱째 나팔이 따른다.
여섯째 나팔이 불리고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되어왔던 네 천사들을 놓아주라 (14절)' 하자 이 네 천사들이 놓였는데, 이 말은 지금까지 이 네 천사들 (혹은 사자들)이 묶여 있음을 말한다. 이들의 임무는 어느 한시 일 월 년 즉 어느 한 분명한 때에 사람들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다. 어떤 국가간 전쟁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마병대'가 있다. 그 수는 이만 만 즉 이억인데, 17-19절은 현대전의 탱크나 장갑차를 묘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탱크나 장갑차가 이억이라 해도 하루만에 지구상 인구 삼분의 1을 죽일 수 있을까? 현재 인구가 70억이라 가만하고 삼분의 일이면 약 23억인데, 2억의 탱크라면 한 탱크당 약 12명 정도만 죽이면 되고 이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하루 혹은 한 시간에 이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는 것 같은데, 원어에는 '그 시와 날과 월과 년(15절)' 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지만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다. 사실 사람들이 몰려있을 경우 한 시간 안에 각 탱크 당 몇 천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은 탱크의 수가 전세계적으로 이억이 되지 않았고, 네 천사들의 지휘 아래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을 가만할 때 아마도 자율 주행이나 AI를 기반으로 한 대량무기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록은 예전에는 황당하다고 여겼을 것이지만 이제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현재 기술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각국은 이렇게나 많은 탱크나 비슷한 장갑차 형태의 살상체를 개발할 것인가? 아마도 구세대 장갑차를 포함한다면 2억을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고, 앞으로는 무인체를 더불어 경량화된 자율 주행 무기들도 대량생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일들은 시간적으로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이렇게 인구 삼분의 일이 죽지만 이것이 네 천사들이 놓여짐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의 심판이 그 원인이 아니라 단지 과학 기술의 오작동으로 사람들은 여길 것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다이몬들)과 또는 보거나 늗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한다. 그들이 행한 죄는 분명한데, '손들로 행한 일들 (원어 복수)'이 원래 악하고, 또 악한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율주행이나 자동화, 인공지능 등 여러 기술이 인류를 편하고 안전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 다시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 따라서 결국 이어지는 것은 우상 숭배 즉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른 피조물을 신격화한다. 컴퓨터나 인공 지능이 앞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인류를 행복하고 삶을 아름답게 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결국 '살인, 복술, 음행, 도둑질' 등의 열매를 낳는다. 이들 중 모두가 복수로 되어 있지만 '음행'만은 단수로 되어 있는데, '음행'과 우상 숭배는 연결되어 있기에 사람들 간의 음행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은 참 하나님을 떠나 그 외 다른 것을 갈구하는 것이 바로 음행의 모습임을 말해준다.
10장 일곱째 나팔
좀 특이한 장이다. 하늘에서 힘 센 다른 천사가 내려와 외치고, 그러자 일곱 우레가 말을 하는데, 그 내용을 요한이 기록하려 하자 하늘에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6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가 그 일곱 우레가 말한 내용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7절 '이루어지리라'는 언급으로 보아 '하나님의 신비 (혹은 비밀)'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7절 원어에는 '복음'이라는 말은 없고, 킹제임스흠정역 처럼 '일곱째 천사가 음성을 내는 날들에 즉 그가 나팔을 불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신비가 그분께서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같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정도로 되어 있다. 즉 이 기록이 허락되지 않은 내용은 후에 드러날 비밀로 보인다.
'작은 두루마리'를 먹자 천사의 말 처럼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소명자의 체험이다. 말씀을 달게 받지만 그 내용은 내 자신이 소화하기에 쉽지 않다. 진리의 말씀이 이러하다. 대부분 말씀 자체는 심플하고 특히 원어 자체는 특별히 어려운 단어들이 쓰이지 않았다.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누구든 읽으면 그 의미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생명을 만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11절 거의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그가 내게 말하기를' 즉 3인칭 단수로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복수로 되어 있어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이다. 앞서 '그들'이 될 수 있는 것을 유추해 보면 바로 그 일곱 우레들인데, 8절은 하늘의 음성이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또 9절에는 천사가 말했지만 11절은 '그들' 즉 일곱 우레들이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진행형). 이미 9장에서는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고 더 이상 이 땅에는 희망이 없는 것 같지만 이 일곱 우레들은 요한에게 '너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과 왕들에게 반드시(dei) 다시 예언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받은 이는 그것이 속에서 쓰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받은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들에게 반드시 다시 예언할 내용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작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일텐데, 이제 이 땅에 남아있는 이들은 지난 9:20-21과 마찬가지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들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개케 할 수도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을 그냥 죽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그들에 대해 혹은 그들 위에 (epi) 예언할 것을 말씀한다. 이러한 예언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동시에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주어진 역사를 이루게 될 십사만 사천의 (아마도 주께 돌아온) 12지파 즉 앞으로 용과 싸우게 될 '성도들 (계 13:7)'에게 용기가 될 것이다.
11:1-14
1절은 '하나님의 성전'을 말하는데, '성전'이라는 말은 계시록에 3:12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 7:15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그리고 여기 11장에 4번, 14장에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그리고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등 여기를 제외하고 모두 역시 하늘에 위치한 것을 기록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하늘'에 위치한 성전은 계속 존재하지만, 이제 '땅'으로 내려 오는 (3:12, 21:2)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음을 말한다.
1절은 '또 kai'로 시작해서 앞 10장과 연결되는 동시에 매우 다른 일이 전개된다.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라고 하는데, 측량에는 그 목적이 있고 쓰임 혹은 기능 혹은 점검을 위해서다. 이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이 아니라 땅에 위치한 것으로서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는 당시 헤롯 성전은 이미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인데, 따라서 앞으로 다시 세워질 소위 제3성전을 말하는 동시에, 그 모든 재난 가운데에도 계속 성전 안에는 '경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한다.
2절은 '성전 바깥 마당은' 이방인에게 마흔 두달 동안 짓밟힐 것을 말씀하는데, 이 시기는 처음 삼년 반이기에 성전 바깥 마당까지 이방인에게 내어준다. 과거 구약에는 성전 밖에 이방인들의 뜰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성전을 짓도록 허하는 것에 대한 이방인들의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즉 마흔 두달 혹 삼년 반을 예언한다. '굵은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하고, '예언'은 앞으로의 일을 말한다기 보다 책망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이들은 성전 안에 있지 않고 아마도 예루살렘 성내에서 예언할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두 감람나무' 즉 올리브 나무들과 '두 촛대'들이라고 한다 (4절). 이 '두 촛대들'의 '촛대'는 지난 1장과 2장에 기록된 동일한 단어로, '두 올리브 나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 쉽지 않지만 '한 올리브 나무와 한 촛대'가 아니라 모두 둘씩이므로 이 두 증인의 정체가 이중적임을 말하는 듯 하다. 또 흥미로운 것은 '그 땅의 그 주 앞에 서 온 (원어 참조)' 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보통 하늘의 주님이지만 여기는 '그 땅의 그 주'라고 하며, 그 앞에 그 두 증인들이 서 왔다고 (have been standing) 말한다. 시 97:5은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라고 기록하는데, 이 두 증인들이 42달 동안 예언하는 기간은 이 땅에 극심한 재앙이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주님은 계속해서 이 땅의 주시다. 사탄은 '세상 임금'이지만, 주님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하늘과 땅의 주시다.
5절의 기록은 이 두 증인이 인간의 모습을 초월한 존재들로 보이게 하는데,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라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8절과 9절의 기록은 이 둘이 죽기도 하고 또 11절은 발로 일어서서 부활할 것을 말하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마흔 두달 동안 나타나지만 그 전에 이미 땅의 주 앞에 서 (존재해) 왔다. 즉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라기 보다는 땅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이들일 것이다. 권위를 부여받고 여러 재앙을 땅에 임하게 하는데 (6절), 마치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재앙들을 연상하게 한다. 7절은 '그 증언을 마칠 때에' 즉 소위 7년 대환난 중 처음 마흔 두달 후에 '무저갱으로 부터 올라오는 짐승'에게 져서 죽임을 당하며 이들의 시체가 8절 '큰 성 길'에 놓이게 될 것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성'이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한다. 즉 예루살렘이며, 2절은 '거룩한 성'이라고 했지만 여기는 오히려 '소돔 혹은 애굽'이라고 한다. 성전이 그 기능을 잃게 되면 '거룩한 성'은 '소돔'이 되어 버린다.
이 두 증인들은 죽임을 당하고, 사흘 반이 지나 부활하고, 또 승천하며, 세상은 이 모든 과정을 볼 것이다. 이제까지는 여러 재앙을 입어도 하나님을 욕했지만 13절은 큰 지진에 의해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칠천이 죽자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이 성은 하나님을 아는 예루살렘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11:15-19
15절의 '세상 나라'는 원어로 '세상의 왕국'인데, 이 왕국은 단수이다. 세상에는 많은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들 (9절)'이 있지만 결국 이들은 모두 '세상'이라는 시스템에 있는 하나의 왕국이며, 이제까지는 하나님을 대적해 왔다. 또한 이 단어는 요즘 회자되는 '신세계질서 (New World Order)'에 의한 단일 세계 정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해온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 즉 그 안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시스템, 코스모스' 즉 만유를 사랑하셔서 독생하신 (모노게누스) 아들을 주셨다. 주님의 죽고 부활하심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만유를 새롭게'한다 (21:5).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구별하는 것 같지만 '다스리시리로다'는 단수형 미래시제이다. 즉 '그들이 다스리실 것이다'가 아니고 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는 하나이시기에 '그가 다스리시리로다'가 된다. 그래서 17절을 킹제임스역은 '이르되, 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께 우리가 감사를 드림은 주께서 친히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기 때문이니이다' 라고 번역했는데, 이 '지금도 계시고.. 오실' 구절은 지난 1:4, 4:8 그리고 앞으로 16:5에도 나온다.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분명 계셔왔고, 지금 현재도 계시며 또한 이제 오고 계신 (현재진행형) 분이심을 증거한다.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라고 시작하는데, 현대 물리학은 소위 '다중우주론'을 상상해 내었다. 이는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이지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은 이러한 것들은 상상해 낼 수 있으면서, 이제까지 계셔왔고 (원어) 지금도 계시며 이제 오고 계시는 분은 부러 잊는다 (벧후 3:5). 주님은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다'!
18절을 킹제임스역은 '민족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이르렀고 죽은 자들의 때가 이르렀으니 이것은 그들이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요, 또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려 하심이며 또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더라'고 잘 번역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고 (히 9:27), 동시에 주의 백성들에게는 보상이 있다. 그래서 요즘 소위 YOLO라는 유행은 매우 반기독교적인 풍조다. 어차피 죽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은 심판이 있을 것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죽으면 심판이 있기 때문에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다'라는 언급인데, 이 '멸하다 diaphtheiro'는 '부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타락시키다 decay, corrupt'라는 뜻도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에서는 이루셨지만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마 6:10), 땅을 정복하라는 의미를 오역해서 개발을 넘어 이 땅 지구를 황폐시키고 부패 혹은 타락시키는 이들은 하나님께 멸망당한다. 여기 때 '카이로스'가 있는데, 바로 이 때다.
19절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말하는데, 이 하늘의 성전은 계속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예전 땅의 성전은 지성소가 막혀서 그 안의 언약궤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의 죽으심으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둘이 되어 그 안의 비밀스러운 것들이 드러났었다 (마 27, 막 15). '성전이 열리니'의 시제는 아오리스트 직설법으로 보통 과거로 번역되는데, 이미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하늘은 거룩하기에 지성소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요한은 그 안의 언약궤를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성전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지만, 하늘의 성전은 땅 위 그것의 원조이며 실체이다. 주님의 경륜은 신약에서 갑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의 성전에서 시간을 초월한 언약에 기반한다. 이 하늘의 언약궤는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히 9:12) 그리스도시다.
12장 두번째 휴거
12장은 '그리고 큰 이적 kai semeion mega'이라고 시작한다. 3절에도 나오는 이 '이적'으로 번역한 단어는 계시록에 여기 처음 나오는데, 신약에 77번 나오는 말로 보통 '표적' 혹은 '이적'으로 번역되었다. 앞의 기록이 모두 요한이 영 안에서 본 것이라면 12장 내용은 '이적' 혹은 '표적'을 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따라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시간을 초월한 일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6절은 1260일 혹은 삼년 반을 언급하기 때문에 이것은 모두 시간 상의 즉 크로노스 상의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6절은 여자가 광야로 피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1260일 동안 양육받는다고 하는데, 이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의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를 의미한다. 앞서 몇몇 기록은 땅에서 이미 일종의 휴거가 있던 것 처럼 들렸는데, 아직도 교회가 존재한다. 이 여자는 '양육'을 받는데, 원어는 trepho로 '음식'을 의미한 trophe에서 왔다. 이 여자는 '교회'이기에 따라서 이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통해 낳은 사내 아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하늘에 계시고, '철장으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자'라는 문구에 원어에는 mello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이제 곧'이라는 것으로, 이미 세세무궁토록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는 다르다. 특히 '모든 민족 ethno (혹은 만국)'이라는 말은 신약에 163번, 또 계시록에서도 꽤 많이 나오는 말인데, 22장 2절까지도 나온다. 즉 소위 천년 왕국 이후에도 이 '민족들'이 존재하는데, 이 때의 모든 민족들은 계시록의 재앙들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이들 특히 천년 왕국 후 잠간 놓인 뱀의 미혹에도 넘어가지 않은 이들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기에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은 없지만 그래도 계속 살아 남은 이들로서, 이 '사내 아이'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는 이들이다. 따라서 소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다.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정말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올려가더라'는 말 harpazo는 꽤나 중요한 단어로 신약에 14번 나오는데, '휴거'를 말할 때 쓰였다 (행 8:39, 고후 12:2, 4, 살전 4:17). 그래서 이 여자가 해산의 고통 중에 낳은 사내 아이는 교회 내에서 먼저 익은 열매 혹은 곡식이며 이들은 아직 대부분 설익은 교인들 즉 성숙하지 못하고 양육이 필요한 전체 중에 먼저 익은 열매로서 휴거를 받는다. 계 14:4은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라고 기록하는데, 여기의 십사만 사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한다. 이 사내아이가 (지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와는 다른) 14장의 십사만 사천과 동일하다고 해석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휴거'를 의미하는 단어가 계시록에서는 여기 처음 나온다는 것이다.
3절은 '또 다른 이적'을 기록하는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큰 붉은 용이 그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다고 한다. 1절의 '관'은 명예를 의미하는 stephano이지만 여기의 관은 '왕관' 즉 정사를 말하는 diadema로 되어 있다. 큰 용은 사탄이 분명하지만 (9절), 이 '왕관'은 권력을 말하기 때문에 땅으로 내려와서는 일곱 왕들의 권세로 나타난다. 먼저 여자가 용을 피해 광야로 도피하지만, 이 용 역시 7절 하늘의 전쟁에서 땅으로 내쫓기는데, 따라서 이 용은 땅에서 여자를 해하려고 하고, 이에 대해 여자는 광야로 도피해서 1260일을 양육받는다. 이 여자는 아직 휴거받지 못한 교회이고, 광야로 도망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 받는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휴거를 받지 못한다 해도 세상 시스템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용이 이 세상 권력 혹은 일곱 나라들과 그 왕들 그리고 열 뿔의 모습으로 교회를 박해할 것이지만, 교회는 이러한 박해를 피해서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의 처소로 날아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1260일을 양육받게 될 것을 기록한다. 6절은 여자가 도망할 것이라 말하지만 14절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로 날아갈 것이라고 기록하는데, 여행이나 국가간 이동이 용이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 코로나 사태로 많은 제약이 생겼다. 따라서 이때에도 이동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정치적 세력을 통해 아마도 광야 즉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비행기를 통해 옮겨질 것으로 보인다. 여자가 양육받게 될 처소인 광야는, 하늘이나 바다나 땅이나 산과는 다른 곳이다. 소위 대환난이 시작되는 두번 째 삼년 반 동안, 특히 한때 두때 반때로 구분된 기간 중에, 교회 역시 아직 이 땅에 있을 것을 암시해 주는데, 교회들 중 아직 휴거받지 못한 이들이 광야 어떤 곳으로 모두 모이게 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이동일텐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앞서 많은 재앙으로 땅과 바다가 뒤틀려서 이미 해안선이나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절은 사탄에 대해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고 말하는데, '우리 형제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이들로서 그들은 성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탄은 이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 밤낮 참소했다고 한다. 즉 이들은 인간으로서 완전하지 못했지만, 다만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다. 하지만 이것이 간단한 일은 아닌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목숨을(원어 ㅍ쉬케)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13절은 '용'이지만 14, 15절은 '뱀'인데 이 둘은 동일하다 (9절). 광야로 피한 여자에 대해 이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했지만 (15절), 16절은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즉 아마도 지진 비슷한 것이 일어나서 광야로 피해서 양육받고 있던 여자 즉 교회 혹은 믿는 이들을 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상'이지만 매우 현실적으로도 들리는데, 아마도 '뱀'은 뱀의 모양을 한 강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여자가 피한 광야 근처에 뱀 같이 구비 흐르는 강에 홍수가 나서 광야를 덮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땅이 입을 벌려 즉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서 그 물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17절은 매우 흥미로운데, 땅이 입을 열어 여자를 구하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라고 한다. 이 '돌아가다'라는 말은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 우선 돌이킨 것을 말하는데, 이제 곧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기 위함이다. 12절은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라고 하지만, 광야에서 보호받는 이 여자는 이쯤에서 많이 휴거를 당하고 이제 '남은 자손 (원어로는 남은 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다'의 원어는 loipos로 영어 left, left behind, remnant, remains 등을 의미한다. Left Behind 라는 제목의 휴거를 다룬 영화에서는 이 '남은 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미처 휴거를 당하지 못하고 버림 받은 자들로 묘사했는데, 물론 그러한 이들이 많이 있겠지만, 여기처럼 마지막에 용과 싸우기 위해 남김을 받은 자들일 수도 있다. 이들은 이쯤해서 믿음이 약한 이들이 아니라 이제 광야에서 양육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진 자들'로 성장한다.
13:1-10
지난 계 12:3은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라고 기록했는데, 이제 1절은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고 기록한다. 용은 하늘에서 왔고 이 짐승은 바다에서 일어났지만 그 모습은 비슷하다. 즉 이 짐승은 용의 현현이다. '바다'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모든 표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에 이 바다 역시 이방 나라 혹은 세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그에 비해 11절은 어린 양 같아 보이는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올 것을 기록하는데, 아마도 이스라엘을 의미할 것이다.
이 바다로부터 나오는 짐승은 용의 어떠함을 가졌는데, 머리들에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다고 한다. 이 '신성모독 blasphemia'라는 단어는 원래 '명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느리다' 라는 의미로 '참된 것을 참된 것이라 말하지 않다' 혹은 그 반대를 의미한다. 즉 '욕하다' 혹은 '거짓증언하다' 등인데, 마 12:31에서 주님께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게 될 것 즉 성령을 부인하면 안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 그 머리들에 있다는 것은 이 짐승이 마치 자신을 절대자 전능자 전지자 등 오직 참되신 하나님만 가리키는 이름들로 자신을 치장했음을 본다.
요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제 과학이 신처럼 경배받는 시대가 된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사람은 인간의 능력으로 영원히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고, 우주의 기원과 그 정체에 대해 여러 가설을 세우는 등 하나님을 떠나서 그를 부인하며 또 다시 과거 바벨탑을 쌓고 있다. 이 짐승은 용의 이런 하나님을 대적 혹은 대치하려는 이름들을 가진 동시에 이 땅에서는 그 나타나는 모습이 있는데, '표범과 비슷하고 그의 발은 곰의 발 같으며 그의 입은 사자의 입 같'다고 요한은 증언했다. 표범은 날렵한 동시에 나무를 타는 것에 능숙하고 그 가죽 무니가 호화롭다. 곰의 발은 후려치는 힘도 강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 보다는 그 발로 매우 정교한 일들을 한다고 조사되었다. 사자는 그 물어 뜯는 입의 힘이 다른 모든 짐승들을 능가할만 하다. 즉 이 짐승은 이 땅에서 가장 빠르며 섬세하며 강하다고 생각되는 짐승의 모든 면만 골라서 갖춘 가공할 모습의 짐승이라서 4절은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라고 온 땅이 말하는 것을 기록한다. 그런데 이 짐승에게 영적 존재인 용이 '자기의 권능과 자기의 자리와 큰 권세를' 주었다. 즉 이 짐승은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힘을 과시할 것인데, 이제까지 세상의 정치와 경제 즉 돈과 힘은 항상 함께 했지만 요즘은 더욱 그렇다. 다국적 기업은 이제 국가간 경계를 넘나들고 여러 국가들에 영향을 과시하고 있으며 더우기 세계 정치에도 관여한다. 정치 역시 문화나 엔터 사업에 연계되어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세계적 정세나 상황에 의한?)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게 되는데,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게 된다. 온 세상이 관심하여 주목하고 또 영향을 미칠 그러한 짐승은 과연 무엇 혹은 누구일까? 이제까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교묘하게 흉내내는 것으로 어느 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요즘 들어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어느 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어느 한 국가 혹은 기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온 땅이' 놀랍게 여기려면 이미 매우 알려진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은 강대국 중 하나 아니면 다국적 기업들의 로고 정도일 것이다. '머리 하나'는 짐승에 속한 일곱 머리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G7을 연상하게 하며, 아마도 강대국의 패망을 예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미 미국은 패권 국가로 달러를 기축 통화 삼아 세계에 막강한 영향을 휘두르고 있는데, 만에 하나 달러의 패권이 무너진다면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는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 상처가 낫게 되는데, 이는 암호 화폐로의 전환을 의미할 수 있다.
4절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온 땅이) 용에게 경배했다. 또 짐승에게 경배했다'라고 기록하는데, 하늘의 용은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그 결과 온 땅은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도 경배한다. 이 '경배하다'는 '프로스쿠네오'로 '절하다'를 의미하며 한글 성경에는 '예배'로도 번역된 말인데, 13장에 5번 나오며 모두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과 짐승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상이나 잡신들에게 문자 그대로 '절'을 했지만, 요즘 특히 서구권에서는 이러한 '절'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으로 직접하는 절도 경배지만 마음으로 '따르'며 (3절) 높이는 것 (4절) 역시 경배하는 것이다.
5절은 '입'을 말하는데, 이 짐승에게는 일곱 머리가 있지만 입은 단수로 되어 있다. 머리가 여럿이라도 입은 하나 즉 같은 말을 하는데, '큰 것'과 '신성 모독'을 말한다. 이 짐승은 세상에 자기를 신처럼 나타낼 것이다. 앞서 두 증인들이 마흔두 달 동안 증거했지만 죽임을 당하고 들려 올라간 후, 나머지 삼년 반 동안에는 이 짐승이 세상에 말을 하며 결국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말을 한다 (6절).
7절은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라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여기 '성도들'은 특별한 임무를 받고 아직 땅에 남아 있던 지난 십사만 사천과 12:17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싸움이 어떠한 모습일지 혹은 전쟁일지, 또 어떻게 성도들을 이기게 될지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이 짐승은 성도들을 이길 것이다. 10절은 이 '성도들'이 전쟁 혹은 싸움에 짐으로 어떻게 될 것을 기록하는데, 아직까지 휴거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성도들'은 결국 짐승에게 져서 사로잡히고 칼에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결과를 당해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들이 성도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 같아 보이는 이들 중에 배교하여 짐승에게 경배할 것인데, 그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다.
13:11-18
13절 후반 9절로서 비교적 짧은 부분이지만 계시록 중에 제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구절이다. 여러 호러영화의 바탕 혹은 주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계시록은 아직 반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이 부분이 보통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이지만 결말은 아직 멀었다.
11절은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는데, 지난 1절의 '바다'에 비해 이 '땅'은 이스라엘을 의미할 것이다. 즉 유대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스라엘의 어떤 조직으로 볼 수도 있다. 아마도 어느 한 개인일 확율이 큰데,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어서 자신을 어린 양 즉 그리스도처럼 보이도록 가장한다. 하지만 말은 '용처럼' 즉 신성모독하는 말을 한다. 이때쯤 해서 복음 비슷한 말로 사람들을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또 아버지를 경배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땅에서 올라오는 어린양 같아 보이는 짐승은 처음 짐승 특히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를 경배하게 한다. 특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능력들을 행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한다. 이 능력은 과거 엘리야나 혹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던 하나님만 보이실 수 있는 능력인데, 여러 영화들은 현재 과학 기술로 충분히 가능할 것을 보여준다.
14절은 지난 '죽게 되었던' 짐승이 어떤 상처인지 기록하는데, 원어에는 '그 칼의 상처를 소유한'이라고 기록한다 (물론 사본에 따라 '칼'이 빠진 것도 있다). 13장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지 아니면 비유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13장 전체 내용은 매우 상징적으로 보인다. '짐승'을 말하지만 생물학적인 짐승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문자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이제 현대에 와서 '칼로 상처를 입'는 것이 어떻게 나타날지도 고민해 봐야 하는데, 정말로 칼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현대에 나타난 여러 현상들에 적용하면 컴퓨터의 'cut'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비약적인 상상도 해본다.
이제 현시대는 컴퓨터나 전기 없이는 사는 것이 불가능한데, 여러 컴퓨터 시스템은 오류나 오작동 혹은 정보유실이나 완전한 셧다운 등이 불가능하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이 '짐승' 중 하나가 현대 나타난 여러 컴퓨터 혹은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칼의 상처'는 시스템 오작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오작동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돈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러한 전세계적인 오작동이 있다가 복구 되었다면 마치 정전되었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온 것 처럼 온 세상이 알것이고 그러한 시스템의 능력을 알게 되어 따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금융 및 화폐 시스템과 맞물리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땅에서 나온 이 짐승은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해 형상을 만들 것인데, 이 '형상' 이라는 말도 현재 컴퓨터에서 많이 쓰이는 '아이콘'의 어원 eikon이다.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그 때에는 현현되어 눈으로 볼 수 있는 아이콘이 되는데,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라고 기록한다. '생기'라는 말은 '호흡, 바람, 영' 등을 의미하는 pneuma 로 마치 창세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살아 있는 혼이 되게 하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즉 단지 우상이었던 것에 생기를 넣어서 말을 하게 하는 기적을 보이는 것인데, 현재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두되는 AI 즉 인공지능을 연상케 한다. 이미 작년 2019년에 구글은 사람과 거의 흡사하게 말을 하는 인공지능을 선보였다. 복잡한 회로로 만들어진 물질적인 것에 코딩이 들어가면 놀라운 일들을 해 내는 컴퓨터, 특히 수퍼 컴퓨터들이 현재 지구상에는 수백개 존재하고,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며, 더욱이 양자 컴퓨터가 개발되면 전세계적으로 가공할만한 네트워크가 이루어질 것이기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경제적인 제재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제재를 가하면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해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데, 이것은 이제 계속되는 소위 big data를 통해 그 기반이 거의 마련되었고,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이러한 현상이 이미 현실 삶 속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어서 거지들도 현금이 아니라 QR code로 구걸한다고 한다. 요즘 소위 '베리칩'이 이 짐승의 표인지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원어에는 '그 오른손 위나 이마 위에' 즉 ep이라는 전치라로 되어 있어서 손 안(in)으로 집어 넣는 베리칩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기 몸 속에 무언가 집어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문신 형태의 QR코드 비슷한 것이 될지 모른다. 베리칩은 몸 안에서 스스로 작동하는 원리인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모든 것이 자동화 그리고 중앙통제식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자가 발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문신 형태가 더 실용적이다. 그럼에도 베리칩은 짐승의 표로 인도하는 과도기적 아이템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 즉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을 거부하는 자들은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할 것인데, 현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지만 상황만 야기되면 그 어떤 일들이라도 충분히 발생 가능하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배웠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나 부요함은 인류 역사 이래 그리 길지 않은 것이다. 현재 과학기술의 개발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며, 특히 기본 low level AI가 아니라 super AI가 완성되는 때를 '특이점'이라고 부르는데, 그 완료가 멀지 않고 (아마도 이미 준비되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15절 즈음해서 현실에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현금은 달러를 포함해 모두 사라질 것이고, 이러한 '표' 없이 즉 컴퓨터 중앙통제 시스템에 연결되지 않고는 '매매' 즉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
17절은 원어로 그 표가 '그 짐승의 그 이름 혹은 그 이름의 그 수'라고 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 그 표에는 숫자로 해석이 가능하고, 그것은 짐승의 이름일 것을 말한다. 그래서 18절은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고 하는데, 현재 쓰이는 아라비아 숫자가 편리한 것과는 달리 과거 헬라권에서 수를 더하는 일은 매우 번거로왔다. 그래서 셈을 할 수 있는 이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불렀고 따라서 이 숫자는 지혜있는 즉 헬라어 표기로 셈을 할 수 있는 자들이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셈의 결과가 있을 것을 말한다. 여러 성경 학자들은 이 숫자가 네로 황제를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히브리어나 헬라어 알파벳은 각자 숫자로 매길 수 있어서 '네론 카이사르'라는 헬라어의 각 알파벳을 더하면 666이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어도 각 알파벳에 숫자를 매길 수 있는데, a를 6으로 시작해서 계속 6의 배수로 수를 매기면 computer라는 단어의 결과가 666이 된다. 놀랍게도 Adolf Hitler라는 이름 역시 666이 되는데, 앞으로 어떤 이름이 히브리어나 혹은 헬라어 혹은 영어의 조합으로 666이 될지 궁금하다. 이것은 바로 그 짐승의 그 이름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18절이 원어로 '그 짐승의 수, 곧 사람(단수, 어떤 혹은 한)의 수이다. 그리고 그 수는 666 (이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4장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7장의 십사만 사천과 같은 사람들일까? 많은 주석은 동일하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들은 또 다른 십사만 사천으로 본다. 7장의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의 합이며 그들 이마에 인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는 정관사가 없이 그냥 십사만 사천이라고 한다 (3절 두번째는 정관사가 있어서 1절을 수식함). 즉 7장과는 별개인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이마에 인침 받지 않고 단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 (1절). 위치적인 면에서도 7장의 십사만 사천은 땅에 있지만, 여기는 어린양이 계신 시온 산 즉 하늘에 있다. 특히 이들은 '땅에서 구속받은' 이들이다. 7장의 십사만 사천은 단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선택받은 이들이지만, 여기 십사만 사천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 즉 동정(parthenoi)이다 (4절). 7장은 '하나님의 종들 (3절)'이지만 여기는 '어린 양' 즉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 속량함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 양께 (대해) 첫 열매 (단수)'이다.
이들은 '첫 열매'로서 7장 이스라엘 지파들과는 다르다. 아마도 환난을 통과하기 전 성숙된 이들로서 먼저 휴거를 받은 이들 혹은 각 시대의 이기는 자들일 수 있다. 이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절의 '24' 장로들 역시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동정' 역시 문자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영적 순결함'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은 특별한 이들인데, 따라서 여러 이단들이 자신들만이 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은 첫째로 남자들이어야 하고, 둘째 여자와 한번도 몸을 섞지 않은 이들이어야 한다. 자꾸 이 십사만 사천을 영해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물론 그렇다고 이기는 자들의 합이 단지 십사만 사천은 아니다. 앞서 일곱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이기는 자들에 대해서 동정을 말씀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6절은 '영원한 복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이미 기록된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복음은 없'기 때문이며 (갈 1:7), 갈 1:8은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기록한다.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영원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원한 복음'은 화를 입기로 작정된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을 대상으로 한다. 이 복음은 땅에 거하는 이들에게 심판의 말씀이며 또한 아직도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고전 1:18은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 (킹흠정역)'고 기록하는데, 복음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믿는 이들에게는 기쁨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이다. 복음 자체가 어느 한 구절로만 요약하기 쉽지 않은데, 많이들 요 3:16을 복음의 핵심으로 보지만 성경은 복음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는 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외친다. 땅에 거하는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8절은 '또 다른 천사가 뒤따르며 말하고 있다 저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지다 무너지다 그녀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즙을 마셔오게 하였기 때문이라 하더라 (원어 참조)'라고 한다. 즉 이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처음으로 갑자기 등장한 말인데, 과거 고대 바벨론은 이미 사라졌지만, 이 비밀스러운 도시는 계속 존재해 왔고, 모든 민족으로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 잔을 마셔오게 한 (완료형) 존재다. 보통 '무너졌도다'라고 과거형으로 번역한 것은 아오리스트 직설법이기 때문이지만, 앞으로도 7번 언급되며 18:2에도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가 다시 한번 되풀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료 즉 과거라기 보다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된다. 그래서 '무너지다 무너지다'라고 개인적으로 번역했다.
9-11절은 세번째 천사가 하는 말인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성경(원어)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없다. 우리는 '믿음' 자체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으며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엡 2:8). 하지만 믿음은 단지 동의나 '깨달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발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또한 이 '자발적인' 행동은 동시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만일 '오직 믿음'을 잘못 이해해서 9절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되고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단지 표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표를 받는 행위에 선행되는 것이 바로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기 때문에생활 자체가 매우 어렵게 되는 것을 넘어 목숨을 위협받게 되는데, 그 전에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절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에 속했다고 하는 이들이 삶의 문제에 직면할 때 육신의 안위만을 위해 세상 왕국에 동조하며 그 시스템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 바로 경배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전에 모두 들림 받으면 좋겠지만,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의지가 필요했듯이, 배교하는 것에도 의지에 맡겨질 것이다.
그래서 12절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하는데, 지난 13:10에도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기록했다. 믿음은 인내를 요구한다. 12절의 언급은 아직도 이 땅에 성도들이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13절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라는 문구가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는데, 원어로는 '이제부터 그 주 안에서 죽고 있는 그 죽은 (자들)은 행복하다' 정도로 되어 있어서 이들은 13-14장 환난을 통과하며 죽고 있는 자들이다. 특히 이들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짐승과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표를 받지도 않음으로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며 또한 14-16절의 주님의 낫에 의해 수확되는 곡식일 수도 있다. 이들은 '낫'에 의해 거두어지는 이들로 표현되는데, '홀연히 변화되'는 휴거를 말하는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아마도 harpazo라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말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이들로 본다.
가끔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는 구절을 여기와 연결해서 설명 하는데, 이 추수 때가 14-16절의 추수를 말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여기 14장에는 '곡식'이라는 단어는 없고, 단지 '수확'을 추수하라고 하는데 이 '수확'이나 '추수하다'라는 명사형과 동사형으로 같은 말이다. 17-20절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라'고 하는데, 복음서에서 쓰였던 포도 나무나 포도와는 다른 의미로 나온다. 땅의 수확에 대해서는 '거두다'가 'therizo'라는 단어인 반면, 이 포도송이들을 거두는 말은 'trugao'라는 말로 포도를 '따다' 정도에 해당한다. 여기 계시록 14장을 제외하고는 눅 6:44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는 구절에만 나오는 걸로 보아 포도를 수확하는 것에 특별히 쓰이는 말이다. 이 '포도송이들'은 심판을 받아 피를 모두 쏟아서 그들에게서 흐르는 피가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고 하는데, 이는 마 13:30에서 '불사르'는 것과는 다르다. 불 심판은 둘째 사망 즉 20:14에 나오는데, 천년 왕국이 끝나고 20:12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라고 기록하여, 이 '죽은 자들'은 여기 14장에서 죽은 이 포도송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두번 죽는다.
15장 마지막 휴거 그리고 일곱 재앙
1절 '재앙 plege'라는 말은 개역개정에는 계시록 9:18부터 나오는 말이지만, 다른 구절에는 '환난'이라고도 번역되었기 때문에 원어에서는 누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후서 등과 함께 계 9:18, 20, 11:6, 13:3, 12, 14, 그리고 오늘 15장 1, 6, 8절 또 후에도 등장한다. 즉 앞서 여러 재앙들이 있었는데, 이제 15장의 일곱 천사들이 가진 일곱 재앙들이 마지막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들로 마칠 것을 말씀한다. 흠정역은 '마칠 것이다'를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들 안에 가득 채워져 있더라' 즉 '채우다'로 번역했지만, '마치다'의 원어 teleo는 '시작과 끝'의 '끝' telos의 동사형이다. 즉 '완성'을 의미한다. 마치 창세기 1장 2절 시초의 심판에 대해 회복하심이 6일째로 끝나서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고, 그것은 완성을 의미한 것과 같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사의 시제가 아오리스트 직설법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보통 과거로 번역되지만, 여기에서는 과거로 번역하면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한글번역은 모두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데, 아오리스트 직설법을 과거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예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다'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2절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라고 하는데, 이기고 승리하고 정복하는 것이 짐승이나 그 우상이나 그 이름의 수 등을 쳐서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하며 고생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말이되지 않는 것 같지만 17:14로 연결되고, 여기 3-4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들이 믿음을 지키고 승리했기 때문에 14장에서 '추수'되어 이제는 하늘로 옮겨졌고,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정작 고생하며 죽임을 당했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데, 그들이 유대인들과 이방 믿는이들 둘을 포함함을 암시하는 것 같다.
1절의 '마지막 재앙'에서 '마지막 eschatos'는 1:11 (원어 참조), 17절의 '처음과 마지막'과 같은 단어다. 이제까지 여러 재앙들이 이미 있었지만, 이 '마지막 재앙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마치는 것으로 극심한 것들이다. 감사한 것은 바로 이 일곱 재앙들 이전에 모든 믿는 이들은 추수 된다는 것이다. 마 24:22은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또 막 13:20도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고 기록했는데, 만일 추수가 이 일곱 재앙들 후에 있었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기고 벗어난 자들'은 주께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16장 일곱 대접, 일곱 재앙의 시작과 마침
일곱 나팔 후에 일곱 대접이다. 일곱 나팔 재앙도 정신없이 발생할 것 같지만 이 대접 즉 마지막 재앙들(15:1)은 정말이지 연이어서 정신없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일곱 재앙은 과거 이집트가 받은 10가지 재앙을 떠올리게 하는데, 출애굽 당시는 이집트에 한해 국지적으로 임했던 재앙이었지만 이 일곱 재앙은 노아 때 홍수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구상에 (눅 21:35) 임한다.
첫째 대접을 쏟자 '짐승의 표를 소유한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생긴다. 이제 땅에는 성도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성도들은 아니지만 그 외에 표를 받지 않은 이들 역시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짐승의 표와 종기가 연관된 것을 보면 이 짐승의 표가 인체에 무언가 부작용을 일으킬 것도 같다. 물론 천사들의 영적인 능력으로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둘째 대접의 재앙은 바다가 '죽은 자의 피'처럼 변해서 모든 생물들이 죽는 것이다. 그냥 피 색깔이 아니라 '죽은 자의 피'라고 하는데, 적조현상보다 더 보기에 공포스러운 색깔이다. 과학적으로 보자면 아마도 이제껏 앞선 재앙들로 인해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광에 이상이 생겨서 바닷물에 적조현상 비슷한 것이 나타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따라 생태계에 혼란이 생기고 바닷물 중 산소 농도가 낮아지며 작은 생물로 시작해서 이를 먹이로 삼는 큰 생물까지 모두 죽는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어질 것인데, 해산물은 아마도 호수나 강 민물고기나 양식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셋째 대접의 재앙은 바다만이 아니라 강들과 물들의 근원이 피가 되는 것으로 앞 둘째와 관련된 듯 하다. 지구 전체에 계속 비가 오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든 강물이 수량이 어마어마해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바다 물 자체의 중량에 의해 해저 땅으로 스며들고 지구 내부의 온도에 의해 덮혀졌다가 지구 여러 곳의 수원지나 산들의 솟는 샘들로 분출하여 수원지들이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는데, 바닷물은 땅을 통과하면서 소금기나 불순물이 걸러지지만 아마 이쯤해서는 땅이 나뉘고 큰 변동으로 인해 이러한 정수기능이 작동되지 않아서 바닷물이 그대로 땅의 여러 수원지로 여과없이 밀려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심판이 '의로우시고 (5절)' '합당하(6절)'다고 물들의 천사는 말하는데, 물들의 천사는 바로 바다와 강들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선한 자나 악한 자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물을 제공했지만, 이제는 악한 자들 즉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이들에게 더 이상 좋은 물을 주지 않는다.
넷째 대접의 재앙은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는 것인데, 아마도 인간이나 생물들에게 치명적인 자외선이나 방사선 혹은 태양풍이 소위 오존층이나 지구 자기장의 파괴나 축소로 지구에 직접 도달할 것이기 때문인데, 앞서 '하늘이 떠나가 (계 6:14)'는 즉 대기권이 말려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Photon belt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어 태양계는 거기에 가깝게 이동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그 영향으로 대기권이 압축되거나 혹은 팽창할 것으로 보고 있고, 아마도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대기권이 말려 팽창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태로는 보통의 태양광도 매우 해로운데, 여기에는 특별히 해가 권세를 받는, 즉 아마도 태양풍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현상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데, 따라서 9절은 건물들이나 수목이 탈 것이라 기록하지 않고 (걸어다니는 혹은 움직이는)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질 것을 기록한다. 현재의 자외선 보다 몇십 배 더 강하고 그 외에도 우주 방사선 등 여러 해로운 광선이 내려쪼일 것이기 때문에 서 있는 상태에서 마치 심한 화상을 입는 것 같을 것이다.
다섯째 대접은 명확히 그 대상이 '짐승의 왕좌'이며 그 대접을 쏟자 '그 왕국이 어두워지게 되었다'. 이제까지 (아마도 3년 반 동안) 그의 왕국은 명성을 떨치며 여러 화려한 빛으로 치장되었었지만 이제 어두워졌다. 땅에 남아 그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아파서 혀를 깨물고 하나님을 비방했는데, 이 '비방'은 '신성모독'과 동일한 단어다. 즉 하나님에 대해 욕을 한 것인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비방받으실 수 없다. 그는 오직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딤전 1:17, 롬 11:36, 계 7:12). 이들은 이러한 재앙을 통해 그 마음을 바꿔서 회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섯째 대접의 재앙은 유브라데 강이 마르는 것인데, 창세기 초반 네 개의 강들 중에 아직 존재하는 것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둘로 보고 있다. 물론 중간에 홍수와 지각 대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창세기의 그것들일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난 80년대 우주왕복선 콜롬비아 호가 과거 존재했던 나머지 두 강의 흔적을 레이저로 발견했다고 한다. 강이 마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뭄으로 인해 종종 마르다가 회복되기도 하는데, 유프라테스 강 정도는 가뭄으로 마를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은 아마도 확실한 표적이 될 것 같은데 흥미로운 것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고 한 대목이다. 문제는 동방이 어딜지 확실하지 않지만 요즘 들어 중국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중국이라면 티그리스 강 역시 말라야 한다. 하지만 티그리스 강이 마를 것이라는 언급은 없다. 그러면 동방이라는 말은 현재 단지 이라크 정도일텐데 '왕들'이라고 복수를 쓴 것을 보면 이라크 외에도 많은 지역을 아우를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강이 마르면 군대의 이동이 편하기는 하지만 현대전을 생각하면 강을 도하하는 여러 첨단무기들도 있고, 또 교량을 세우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동방'이라는 말은 원어로 '해 뜨는 the rising sun' 인데, 이 말은 보통 '동쪽'으로 이해되지만 보통 rising sun 은 일본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본에서 원정 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쪽에 위치한 많은 국가들 즉 일본까지를 포함해서 모두 원정 오는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중국은 물론이지만 인도나 일본에서 원정 오려면 바다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걸프만을 가로질러 쿠웨이트 북쪽 이라크 남부에 군대를 내려놓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따라서 티그리스 강은 건널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고, 이란이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티그리스 강 중 얕은 곳이나 혹은 교량을 건너 오면 된다.
이것은 아마도 3차대전일텐데, 그 발발의 원인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또한 귀신 즉 원어로 '다이몬들의 영들'이다. 사탄의 왕국에 용이 있고, 짐승이 있으며 또 거짓 선지자가 있고 그들의 입에서 세 더러운 영들이 나오는데, 결국 이 세 영들은 다이몬들을 조정하는 영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영들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은다 (13, 14절). 전쟁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앞으로 있을 소위 아마게돈 전쟁은 이 다이몬들의 영들이 세상 왕들을 꾀임으로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15절에 다시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는 것인데, 아직도 이 땅에 주의 백성들이 남아 있을까? 아마도 이렇게 말씀함으로 주의를 주시는 듯 하다.
일곱째 마지막 재앙의 대접이 쏟아지자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라고 하신다. 이 '되었다'는 말은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tetelestai (완성하다 요 19:30)'와는 다른데, 여기는 'ginomai 되다' 라는 말이다. 모두 완료형이지만 '이루다'는 중간/수동태이고 여기의 '되다'는 능동태이다. 보통 '되다'는 수동태로 이해되지만 여기는 능동태인데, 이 일곱째 대접이 쏟아짐으로 모든 재앙이 마무리되는 것이 '성전의 보좌'에서 나는 '큰 음성'에 의해서다. 즉 이러한 재앙들은 자연에 의한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정하신 심판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18-21절의 재앙들이 따른다. 즉 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이 16장으로 일곱 재앙은 끝나게 되는데, 그 후에는 천년 왕국이 오고 또 그 다음은 불심판이다.
18절의 '지진'은 단수이며 그 강도가 매우 세서 이제껏 없던 지진이다. 따라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며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게 된다. 창 10:25에는 노아의 홍수 후에 땅이 나뉘었음을 말하는데,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몇 만년 혹은 몇 억년 빙하기나 대륙간의 융기 등은 이때 발생했다. 하지만 여기 18절은 큰 지진으로 또 다시 이렇게 지표가 갈라질 것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21절의 '우박'도 단수라는 것인데, 한달란트의 무게는 가공할 만한 것이지만 단지 하나의 우박이 떨어졌다고 '사람들이' 큰 재앙을 겪지는 않는다. 이러한 재앙은 출애굽기 9장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도 단수로 되어 있다. 즉 이 '우박'이라는 단어는 우박 한 알갱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그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 덩어리들이 쏟아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폭탄 수준이다. 왜 우박이 마지막 재앙이 될까? 이 우박은 자연적인 우박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포탄들이 쏟아지는 것일 수도 있다. 전면전이 시작되면 아마도 모든 무기들을 사용하는 소모전이 될텐데, 만들어진 모든 포탄들이 소모되는 것이다. 사실 한 달란트의 무게는 일반적인 포탄의 무게와 비슷한데, 탱크에서 사용되는 포탄의 무게가 23-38킬로 정도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탄들이 우박처럼 내리는 것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17장 창녀의 비밀 그리고 짐승
우선 '음녀'라고 번역한 말은 porne로 '창기, 기생' 등으로 다른 구절에는 번역되었는데, '창녀'를 뜻한다. 계시록에는 처음 등장하는데,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이 음녀의 심판에 대해 보여줄 것을 말씀하며 땅의 임금들이 그녀와 함께 음행하고 땅에 사는 이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함을 언급한다. 3절은 '영 안에서 나를 광야로 데리고 갔다'라고 했는데, 이 천사 중 하나가 요한을 영 안에서 인도한 곳은 '광야'다. 이 동일한 단어 'eremos'가 앞서 12:6에도 쓰였는데 거기에는 사내 아이를 낳는 여자 즉 교회가 광야로 인도함을 받은 것이지만, 이 동일한 광야에 음녀 역시 존재한다. 즉 이 음녀는 땅이나 바다가 아니라 교회와 동일하게 광야에 존재해서 그 모습이 교회를 닮았는데, 순수한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붉은 짐승을 탄' 음녀 혹은 창녀다 (3절 5절).
교회가 그 본모습을 잃고 세상과 그 정치 세력과 연합하면 종교화 되버리고 정치세력에 좌지우지 되는 창녀로 전락하는데, 처음에는 붉은 짐승 즉 세상 세력을 타고 권세를 떨치는듯 보인다. 하지만 그 탄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가득'한 짐승이다. 이 여자는 겉으로 보기엔 자주색과 붉은 색 옷을 입어서 위엄있어 보이며 금 보석 진주 등으로 단장해서 마치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듯 보이지만 (계 21), 손에 든 금잔에는 가증스러운 것들과 그녀의 음란함의 부정한 것들로 가득하다. 5절에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말해주는데, 그 이마에 '비밀, 그 큰 바벨론, 창녀들과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쓰여졌다고 한다. 즉 이 음녀는 '비밀 (혹은 '신비)'라서 겉모습만으로는 확연한 정체를 알 수 없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고 있다고 하는데 '취하다' 동사의 시제가 현재진행형 능동형으로 되어 있다. 이마에 '쓰였다'는 완료형이지만 이 '취하다'는 현재진행형 능동태로 보아 이제까지 그 비밀을 숨기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성도들과 예수님의 증인들에 대해 핍박함에 취해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아 많은 이들이 해석하듯 이는 로마 카톨릭으로 보인다. 교회라고 불리며 그 안에 신자들도 존재하지만 많은 비밀들로 쌓여 있고, 개혁하여 거기서 나왔다고 하는 개신교들 조차 많은 부분 그를 (영어로 하면 그녀를) 좇고 있다. 이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많은 종교들이 연합하게 될 것인데, 지난 (2020년) 6월 말에 세계종교통합집회가 개최되려고 했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8절은 여자가 탄 이 짐승에 대해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하며 또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마도 요한이 이 이상을 봤던 때일 것인데, '무저갱으로 부터 올라와'의 '올라오다'는 '곧 올라오고 있다' 정도로 되어 있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17장 후반부에 더 자세히 기록되는데, 여러 주석들은 '로마'로 설명하지만, '지금은 없으나'라는 구절은 아마도 로마가 아닐 것을 말해준다. 무저갱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아마도 인간의 역사 이전에 갇힌 어떤 존재일 수 있다. '짐승'이라는 말은 13장에 가장 많이 나오지만 계시록에서 계속 등장하는데, 여기 이 짐승은 유독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앞서 기록했던 짐승의 모습 즉 일곱 머리와 열 뿔 (7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앞서 13장에서 말한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에 비해 이 짐승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
개역개정은 '들어갈 자니'라고 번역해서 이 짐승이 어떤 인물일 것이라는 오해를 하게 하지만 원어에는 '자'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며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서 멸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이 짐승의 비밀에 대해 9-10절은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10절은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앞서 8절은 '지금은 없'다고 하지만 10절은 '하나는 있고'라고 하는데, 8절은 짐승 자체를 말한 것이고 10절은 그 짐승의 일곱 머리 즉 산 혹은 왕을 말한다.
17장에 묘사된 이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짐승은 그 짐승 자체에 머리가 일곱 달린 것이라기 보다는 시대에 따라 일곱개의 머리가 하나씩 나타나는 동일한 짐승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열 뿔 역시 각 머리에 하나씩 혹은 그 이상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한 머리가 나타날 때 마다 열 뿔이 존재하며 이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3절과 7절에는 '머리 일곱'과 '뿔 열'은 현재진행형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8절과 11절은 '그리고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은' 이라고, 또 '또한 자신의 여덟 번째 이다 (혹은 여덟 번째가 있다) 그리고 그 일곱(개들) 밖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멸망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원어 참조)'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아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11절에 원어에는 개역개정 처럼 '왕'이라는 말이 없고 여기 '멸망 안으로 들어간다'라는 부분은 8절과 동일하다. 10절의 '다섯은 망하였'다는 말은 이 일곱 왕들 중에 역사적으로 다섯은 이미 지난 것임을 말하는 듯 하다. 즉 이 짐승 자체는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인류 역사 혹은 그 이전부터 계속 존재해온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9절에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생각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하는데, 앞서 13장에도 '지혜 sophia'를 말하며 사람의 수인 666을 세어 보라고 기록했던 처럼 여기 이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뿔 역시 지혜가 있어야 즉 셈을 할 수 있어야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곱 머리 각자가 나타날 때 마다 열뿔이 달려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 짐승의 머리 즉 일곱 왕 중 여섯째 즉 '하나는 있'었지만 일곱째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오늘날은 이 일곱째도 없고 이제 그 짐승의 여덟째로 나타나는데, 이 일곱째는 어디로 간것이고 왜 바로 여덟째가 되는 것일까? 다니엘의 70이레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다니엘서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유대민족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계시록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며 인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일곱째 짐승이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오늘날 없는 것은 이 때가 이방인의 때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 여덟 번째로 나타나는 짐승에게 아직 왕국을 받지 못한 열 뿔 즉 열 왕이 있는데 (12절), 바로 이 열 왕이 말세에 나타나는 세력이 되며 이들은 하나가 되어 짐승에게 그들의 능력과 권위를 바친다.
이 열왕이 마지막 때 등장해서 어린양과 전쟁을 벌이는데, 어린양은 주들 중의 주, 그리고 왕들 중의 왕이기에 그들을 이기실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은 부르심 받고 택하심 받으며 신실한 이들이다. 개역개정은 14절을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흠정역 처럼 '이들이 [어린양]과 전쟁을 하려니와 [어린양]께서 그들을 이기시리니 그분은 주들의 [주]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또 그분과 함께 있는 자들은 부르심을 받고 선정된 신실한 자들이니라, 하더라'로 되어 있다. 즉 함께 한 이들도 이길 것이라는 말은 없다. 13장은 짐슴이 성도들을 이길 것이라고 기록했었다. 믿는 이들의 이김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승리하심에 참예하는 것이다.
결국 이 열 뿔 즉 열 왕이 있는 짐승은 그위에 탔던 여자 즉 그 창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는데 (16절), 18절은 이 창녀가 '땅의 왕들 위에 왕권을 가진 큰 성'이라고 설명한다.
18:1-8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자면 열불이 난다. 좌파 세력들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놓고 옹호하며 여러 정책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배후는 영적 싸움이지만, 자유진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 단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대립 정도로, 혹은 그보다 못한 좌파와 우파 사이의 갈등 정도로만 본다. 이지경까지 된 것은 이제껏 소위 우파에 속한 이들 즉 자유진영과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발란스가 필요한데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과 이익에만 올인했다.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성경적이지 않은데, 그 기본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유물론인 것은 물론이고, 보편적인 절대평등이라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 특히 사도행전 초반에 발생한 초대 교회에서 그 비슷한 실행이 있었지만 그 조차 지속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역사도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가능했는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도 않고 그 도움을 구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들의 능력으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또 다른 종교에 지나지 않으며 동시에 이는 또 다른 바벨탑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산업혁명 후에 발생했다고 하지만 그 기본적 요소는 자본 혹은 돈 즉 맘몬을 추구하는 것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직후부터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에 대항해서 생겨난 것이 공산주의인데,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폐기된, 역사적으로 실패로 드러난 사상이며 사람들의 기본 인권이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전혀 성경적일 수 없다. 자본주의는 적어도 개인소유권과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현 세상에서는 아직 이를 대체할 만한 정책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크게 성공한 이들 중에 자발적으로 사회에 환원하며 공헌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역시 전혀 성경적인 것은 아닌데, 자본을 사람이나 영혼보다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자체의 가치 기준이기 때문이다. 2절에 다시 등장하는 '큰 성 바벨론'은 그 모습으로 보아 파산한 공산주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바벨론에 대해 2절은 원어로 '다이몬들의 거처와 모든 더러운 영의 감옥과 모든 부정한 새의 감옥과 모든 부정하고 역겹게 여겨지는 피조물들의 감옥이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개역개정의 '귀신'이라는 말은 소위 '사람이 죽어서 된 혼백' 정도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이 '다이몬들'은 보통 물 속에 거하며 특히 바다에 그 처소를 정한 것으로 성경은 말하지만, 2절에는 특이하게도 이 큰 성 바벨론 안에 그들이 처소를 삼았다고 한다. 자본주의를 통해 생산되는 여러 가지 화려해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는 이 '다이몬들'이 존재한다.
여기 '처소'라는 말은 'katoiketerion'인데, 신약에 단 두번 나오며 동일한 말이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즉 '하나님의 처소'라는 문구에 쓰였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이지만, 이 큰 성 바벨론은 다이몬들이 거하는 처소이다. 또한 '모든 더러운 영의 감옥과 모든 부정한 새의 감옥과 모든 부정하고 역겹게 여겨지는 피조물들의 감옥이 되었'는데, 겉으로는 크고 멋진 성이지만 그 내부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혹은 세상의 이면인데, 속으로는 이렇게 이 더러운 것들이 모이는 것에 비해 겉으로는 음행이 만연하며 사치와 치부로 화려해 보인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과 이자를 바탕으로 투자하여 더욱 부를 축적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부익부빈인빈은 물론이고 불로소득 등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가 인생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은 클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죄들 (4절)'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받을 재앙들이 뒤따른다 (4절). 자본주의에 입각해서 만들어 놓은 인간의 법들은 하나님 앞에는 '불법'이고 (5절), 이에 따른 모든 절차와 정책 그리고 집행 즉 행위들 (6절, 복수)은 모두 그 응당한 보응과 심판을 받는다. 단지 그만큼의 심판이 아니라 '두 배'를 받는데, 그 죄들의 무게가 매우 무겁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모든 '영화'와 '호화로움'은 주님 보시기에 악하다. 바벨론은 '한 날'에 재앙들이 임하는데, '사망과 애곡과 기근'이 단 하루에 임한다. (개역개정의 '흉년'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그 큰 성 바벨론이 강하고 영광스럽고 화려해 보여도 단 하루만에 망하는데, '그녀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대치하는, 익숙해진 시스템 안에 안주하지 말아야 함 (계 18:9-24)
이 '큰 성 바벨로, 그 견고한 성'은 상징일까 아니면 어떤 국가일까? 만일 국가였다면 '왕국'이라고 표현했겠지만, 계속 '성 polis'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말세에 존재하는 어떤 국가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같은 '시스템'일 수도 있겠다. 물론 10, 15, 18절의 '멀리 서서'라는 표현은 공간적인 거리를 말하고, 17-18절은 실존적인 면을 기록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어떤 지역일 것이라 볼 수도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패권국인 미국이 확실하다. 더우기 미국은 AI가 가장 발달된 국가로 앞으로 미국 외에는 AI를 제대로 구현해 낼 국가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계시록 18장을 즈음해서는 국가간 구별이 무의미해질지도 모르겠고, 또 한면으로 미국은 2차 대전 후 비교적 최근에 패권국 자리에 올랐지만 계시록에서 말하는 이 크고 견고한 성인 바벨론은 인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온, 그래서 '바벨론'이라고 칭하는, 어떤 실체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다니엘의 흉상이 발로부터 머리까지 공중에 뜬 돌로 인해 완전히 부서지는 것 처럼 이 바벨론 역시 하루 만에, 혹은 '한 시간'에 (10절) 망한다.
매매 혹은 무역을 통해서 부를 쌓는데, 12-13절은 무역 물품들을 열거한다. 고대부터 근대까지는 이 여러 물품들이 막대한 부를 쌓기에 거래 되어 왔던 것이 확실하고, 현재까지도 금 은 보석 진주 여러 의류 및 천 그리고 사치품, 향품들과 음식이며 짐승 그리고 각종 운송 수단과 인력 등은 동일하다. 다만 현대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에너지 즉 원유나, 또 컴퓨터 등은 기록되지 않았고 특히 요즘에는 별 가치 없어 보이는 계피가 언급된다. 이러한 열거는 계시록의 이 부분이 과연 미래에 일어날지 의문을 갖게 할 수도 있는데, 2천년 전에 비해 현재 활발히 거래되는 물품의 양상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피가 언급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꽤나 오랫동안 거래되어 온 물품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요한 것은 이 크고 견고한 바벨론 성이 다만 물질적으로 사치했던 것 만이 아닌,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성도들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아래 풍요로움을 누릴 수는 있지만, 거기에 안주할 수는 없다. 주님의 왕국 아래 있음으로 자본주의던 공산주의던 주님을 대치하는 것들과 싸워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삽시간에 망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지금 견고하게 보이는 많은 것들이 그날에는 한 시간 내에 망하게 될 것을 봅니다. 현 시스템을 부정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거기에 미혹되고 그러한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포기하며 속지 않게 하소서. 성도로서, 선지자로서 증인들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의 백성들이 모이며 회개함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예언의 영, 예언의 핵심인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계 19:1-10)
19장에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4번 나오는데 신약에 계시록에서만 이 말이 나온다. 구약에도 많이 나올 것 같지만 시편에만 23번 나오는데, '할랄 (찬양하다)'과 '야 (여호와)'의 합성어로 명령형이다. 이 말은 찬양과 승리의 선포이다. 계시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땅을 더럽힌 음녀가 심판을 받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제 모든 수고가 끝나고 승리했다.
6절 후반부는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라고 하는데, '통치하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 직설법이며 보통 과거로 번역하지만 '통치하셨다'라고 하면 이상한 번역이 되기 때문에 이 아오리스트 직설법은 과거로만 해석할 수 없고, 시간을 초월한 시제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이고 시간 자체를 초월한다.
7절의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는 시제 역시 동일한 아오리스트 직설법인데, 논리적으로라면 현재완료형이 맞겠지만 그리스도의 아내 즉 교회 혹은 신부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일찍 죽임을 당하셨던 것 처럼 이미 영원전부터 준비가 되었다. 계시록의 기록은 지금 시간 안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주님의 예정과 경륜 안에서는 이미 이루어졌고 따라서 요한은 이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이것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8절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아내에게 '고운 세마포, 빛나며 정결한 옷을 입도록 주셨는데'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한다. '아내'는 단수지만 이 아내는 '성도들' 즉 다수의 구원받은 이들과 동일한데, 그들은 곱고 빛나며 정결한 세마포 옷을 받는다. 이 옷을 하나님께 받지만 (원어참조) 동시에 그 옷은 그들의 옳은 행실이다. 이 말은 그들 자신의 행위 자체가 옳다는 것이 부각되는 것 보다는 그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의미다. 인간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이 '세마포 businnos'라는 말은 계시록에만 나오는데, 마 22:11-12에는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이라고 비슷한 말이 기록된다. 여기 '예복'은 문자적으로 '결혼 예복'이라는 의미인데, 오늘 말씀에는 '예복'이 아니라 '세마포 옷'이지만 어린양의 결혼을 기록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마 22:10절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고 기록하는데, 어린양의 아내인 '성도들'이 완벽한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다만 그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그 부름을 받고 왔는데, 순종하고 올 때 그들은 예복을 받는다. 그 예복을 빨고 입는 것은 그들에게 달렸다. 어린 양의 신부는 이러한 예복을 믿음으로 받고 빨고 입을 때 준비가 된다. 그래서 다시 마 22:14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고 말씀하며 이는 지난 17:14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와 연결된다. 우리는 부르심만이 아니라 택하심까지 받아야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예복 혹은 세마포를 받을 때 가능하다. 여기에는 순종이 따른다.
9절에서 요한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하자 천사는 10절에서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라고 말한다. '같이 된 종'이라는 말은 한 단어로 '함께 sun 종 dulos'의 합성어이다. 요한과 형제들은 모두 '성도들'로서 어린양의 신부의 일부이지만, 이 능력많은 천사는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 모든 믿는 이들이 '종'인 것 처럼 '종'일 뿐인데, 천사는 모두 '섬기는 영'이다 (히 1:14). 하지만 아내 혹은 신부는 어린양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 같은 (크리스천) 거룩한 존재다. 그래서 천사는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하는데, '경배하라' 즉 '절하라'의 시제는 '현재진행형 명령형'이 아니라 '아오리스트 명령형' 즉 존대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나 믿는 이들이 서로에게 부탁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말할 때 조차 쓰이는 말인데, 우리가 마귀에게 절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영적 권위는 인정하기에 미가엘 조차 비방하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유 1:9). 지금 이 영광이 충만한 천사는 (18:1) 요한에게 '그렇게 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 절하세요' 라며 예를 갖추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보다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10절은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는 흥미로운 기록을 하는데, 이 '예수의 증언'이라는 말은 '예수의' 즉 소유격이지만 예수님 당신 자체의 증언인 동시에 주님을 증언하는 성도들을 포함한다. 즉 '예언의 영'은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핵심이며 이 '영'과 '예언'이 주님께 속함으로 온전히 주님을 가리키며 증거하기 때문이다.
주님, 영 안에서 이미 이루며 승리한 사건들을 바라보며 오늘 그 예복을 받고 준비되는 주의 정결한 신부 삼으로서. 성도들이 진정 거룩한 주의 신부로 설 수 있도록 그 날 준비될 것을 봅니다. 부족한 저도 그 가운데 있게 하소서.
가짜 뉴스를 전하는 가짜 선지자 (계 19:11-21)
11절에는 흰 말을 타신 분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고 개역개정은 번역했다. 이 말은 원어로 '믿음직한 pistos (형용사)'과 '참된 alethinos (형용사)'인데, pistos는 '믿음'이라는 말과 관계가 있고 alethinos는 '참' 혹은 '진리'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요 1: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는데, 과거 초림하셨을 때는 주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지만 이제는 신실하시고 또 동일하게 진리가 충만하시다. 계시록 후반부로 이제 은혜 시대는 지났고 믿는 이들은 영생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대적하는 이들은 심판을 받기 때문에 '신실하심'과 '참되심'으로 나타나신다. 주님은 공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이미 음녀가 심판을 받았지만 그녀를 따르며 음행했던 만국에 대해서는 아직 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싸우시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으로 치시며 철장으로 다스릴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즙 틀을 밟을 것을 기록한다 (15절). 여기 동사는 모두 다른데, '치다'는 아오리스트 가정법, '다스리다 (혹은 목양하다)'는 미래형, 그리고 '밟다'는 현재진행형 직설 능동태로 되어 있다. '밟고 있다'는 지금 이상 중에 밟고 계시는 주님을 본 것이고, '치다'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심을, 그리고 '다스릴 것이다'는 앞으로 모든 성도들과 함께 만국을 목양할 것을 말씀한다.
개역개정은 13절을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고 번역해서 '옷'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원어에는 킹제임스역 처럼 '그분의 이름' 즉 흰 말을 탄 주님의 이름이 '그 하나님의 그 말씀'이라고 한다. 이것은 요한이 쓴 복음서와 일맥상통하는데, 그의 복음서 처음부터 주님은 '하나님의 로고스'이심을 말했다. 창조 이전부터 계시고 그를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성육신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이제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주님은 계속해서 동일하게 '그 하나님의 그 말씀'이시다.
19절은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라고 기록하는데, 이 짐승과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은 '땅'에 있지만 주님과 그 군대는 '하늘'에서 오신다. 이것은 '공군'과 '육군'의 전술력 차이 같이 처음부터 그 결과가 분명한데, 결국 20절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졌다고 하는데, 이 둘은 잡히자 마자 처음으로 산 채로 유활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 앞으로 이 유황불 못에 모든 악한 것들이 던져져서 영원히 태워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이 '그 짐승'과 '그 거짓 선지자'가 먼저 잡히고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는데, 특히 이 거짓 선지자가 이렇게 짐승과 더불어 제일 먼저 심판을 받는 이유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했기 때문이다. '표를 받고 경배하던' 즉 이미 그렇게 한 이들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원어에서는 그의 미혹으로 그렇게 사람들이 했을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가장 큰 죄는 '거짓' 즉 참된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인데, 요즘 너무도 가짜가 판을 치고 진실을 말하면 가짜로 매도되는 시대가 되었다.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부인하는 진화론이며 또한 무조건 믿기만 하면 천당간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회개와 변화와 행동을 낳는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약 2:14).
사람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미혹당하는데, 이러한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믿는 이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를 전하는 거짓말쟁이들과 혹 가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모두 이 거짓 선지자의 영을 받은 이들이다. 이들은 '그' 거짓 선지자가 제일 먼저 불못에 던져지는 것 처럼 던져질 것이다.
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는 달리 21절은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 입의 말씀의 권위로 사람을 살리시기도 하시며 죽이시기도 하실 수 있다. 이 땅에서 짐승에 절하고 따르던 자들은 우선 한번 죽어야 하며, 그 후 다시 일으켜져서 영원한 사망 즉 둘째 사망으로 들어간다.
주님, 복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가 됨을 압니다.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하기 원합니다.
이미 첫째 부활과 그 생명을 누리는 행복한 성도들 (계 20:1-6)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이미 불못에 던져졌지만 용 곧 옛 뱀 즉 사탄이며 마귀는 아직 불못에 던져지지 않았고 대신 어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 용을 잡는다. 용 즉 옛 뱀 혹은 마귀 사탄이 무섭고 권세있어 보일지라도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 한' 자로 사람들을 미혹함으로 사망으로 인도한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한 천사가 과거 천사장 미가엘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마귀를 간단히 제압하는데, 이것은 심판과 집행이 능력 보다는 권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가끔 그리스도와 사탄 둘이 싸우는 그림을 보는데,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과 상대도 되지 않고, 하나님은 직접 그를 심판하거나 집행하지도 않으신다. 그러한 것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 아니라, 그분 아래 종들이 하는 것이다.
이 용이 천년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는데,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이미 불못에 던져졌지만 이 용은 미혹하는 자, 거짓말의 아비며 속이는 자이기 때문에 천 년 후에도 만국을 미혹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무저갱에 결박되어 있는 천년 간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직접 주님과 함께 다스리며 이 땅은 공의가 온전히 실행되고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말씀과 그 영광이 땅에 충만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4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기록하는데 이 보좌에 앉은 자들이 영적 존재인지 아니면 사람들인지 분명하지 않게 들린다. 원어를 보면 '내가 보다'라는 동사가 단지 한번 나오며 '보좌들'과 '혼들' 둘다 그 목적어로 되어 있다. 즉 이 보좌에 앉은 이들과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이 동일한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러한 신앙을 통해 목 베임으로 보좌에 앉았다.
여러 한글 번역들에는 이 목 베인 혼들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원어에는 목 베인 혼들은 대격으로 '내가 보다'의 목적어로 되어 있지만,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은 'hotines, those who' 주어 형태로 되어서 따로 나누어 진다. 즉 목 베인 혼들은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이들이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은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리게 될 이들이다.
이러한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이 '목 베이다 pelekizo'라는 말이 계시록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이며 시제는 완료 즉 과거를 말하는데, 이 pelekizo라는 말은 특히 문자적으로는 '도끼로 찍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주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에 의하면 가룟유다를 제외한 주님의 열두제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고, 그 외 열두제자 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순교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심판하는 권세를 받게 될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의 동사 '경배하다'와 '받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 직설법으로 되어 있다. 아오리스트 직설법은 보통 과거로 해석하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고 계속 나누었는데,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다스리니)'의 '살다'와 '왕노릇하다' 역시 동일한 아오리스트 직설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과거로 번역한다면 '살았다'와 '왕노릇 했다'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아오리스트 시제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계시록의 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이들은 소위 대환난 기간 동안에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로서 그 숫자가 기독교 전체 역사에 비하면 매우 적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통해 주님을 신실하게 믿은 이들, 특히 달란트와 므나 비유 처럼 열심히 섬김으로 많이 남긴 이들에게 주어진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 사라지고 다만 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만 오직 천년 동안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언급은 분명 앞으로 기술의 진보를 통해 이루어질 일들임에 분명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아오리스트 시제)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오직 여러 역경을 거치며 주님을 열심히 섬김으로 열매를 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가 단지 이익을 내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말씀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달란트는 금이며 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고 남기는 것 역시 동일한 달란트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나 타고난 능력이 더 커지는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더 커지는 것으로서, 이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세상 사업처럼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일은 아버지와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들은 다시 살게 되는데,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미 휴거되어 하늘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이들 역시 살아있을텐데 왜 이들에 대해서는 첫째 부활이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은 이미 부활 생명으로 살아서 하늘 위에 있기 때문일 것인데, 후에는 새 예루살렘과 함께 내려온다 (21:2). 주님께서는 요 11:25-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후에 부활을 경험할 것이지만, 사실은 믿을 때 즉시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며 죽지 않는다.
이렇게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은 6절이 '행복하고 거룩하다'로 시작하며 '그 첫째 그 부활 안에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참여하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는데, 해석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말씀을 읽는 이들이 현재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우리는 앞으로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 생명 안에 영원을 이미 살고 있는 하나님의 행복하고 거룩한 성도들이다.
주님, 말씀의 비밀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다만 주님의 약속과 말씀은 모두 완벽하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이루어지며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며 살아 있게 하소서.
악한 것들을 영원히 소각하는 불못 (계 20:7-15)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있다가 반드시 잠간 풀리게 되는 이유는 그 모든 재앙 후에도 아직 만국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죽거나 혹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가 아직도 땅에서 이제 천년 동안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살며 세대를 보내고 죽고 또 번성한다. 그래서 8절은 '나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고 기록하는데, 이들은 '땅의 사방 백성' 즉 땅에 속한 이들이며 특히 구약에서 기록된 곡과 마곡이 그때에도 존재할 것을 보여준다. 이미 많은 재앙으로 땅이 뒤틀리고 대륙이 움직였을텐데 아직도 곡과 마곡이 존재하며 땅의 네 코너 (원어 참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지각 변동에도 곡과 마곡으로 나타나는 이들이 있음을 본다. 사탄이 그들을 꾀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모으는데, 천년 동안 번성한 땅의 백성들은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다.
9절 첫부분이 흥미로운데 우리말 성경은 '그들은 평원으로 올라와 성도들의 진, 곧 사랑받는 도성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라고 번역했다. 즉 이때 즈음해서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받는 도시'가 있는데, 이렇게 특별하게 성도들이 사는 장소가 따로 있을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소는 '평원' 즉 넓은 곳인 동시에 '올라와' 즉 높은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곳에서 성도들은 살며 천 년 동안 다스린다. 이러한 묘사는 현재 예루살렘과는 다를 것 같다. 사탄과 미혹함을 받은 땅의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은 천 년 동안의 공의로 다스리심을 경험하고도 사탄에게 속아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킴으로 삽시간에 끝난다.
10절에는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기록하는데 '미혹하다'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으로 마귀는 계속해서 속이며 미혹하는 거짓말쟁이다. 그러한 그가 드디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 그런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이미 던져진 곳이며, 이들 셋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이다.
11절은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하는데, 백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요한이 본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이렇게 하나님을 봤다는 점이다. 살아서 하나님을 본 사람이 구약에는 모세 정도인데, 그 때는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영 안에서' 봤다. 그런데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9)'라고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물론 백보좌에 앉으신 분까지 본 것이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는 말은 땅과 하늘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시간이나 공간은 그 설 곳이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20장에는 '죽은 자들'이라는 말이 5번 나오는데, 5절과 12, 13절에 각각 두번씩 기록되었다. 원어로는 '죽은' 이라는 복수형용사이며 '사람' 혹은 '자'라는 말은 없다. 즉 이 말은 동사 '죽다'가 아니라 '죽은'이라는 형용사인데, 이렇게 죽어 있는 자들이 심판을 받으며 이들은 '책들이 펴져 있'는 즉 펴져있는 복수의 책들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생명없는 죽은 자들로서 그들에게는 육신이 살아 있으나 죽어 있으나 죽은 상태이다. 그들은 죽은 이들로서 사망의 행위를 한 그대로 심판을 받는데, '또 다른 책' 즉 생명책과는 상관이 없다. 이 생명책에는 행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이름만 기록된다. 이 말은 생명책에 기록된 이들이 믿음만 중요하지 어떤 행위로 살았는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은 그 모든 행위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며 두루마기를 빨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오직 멸망의 심판을 받는 이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13절 '바다'와 '사망' 그리고 '지옥 (하데스)'들이 죽은 자들을 내어주는 것인데, 문자적으로 '바다'는 이해가 가지만 '사망'이나 '하데스' 등은 어떤 물질적인 공간이 아닐 것 같은데 이렇게 기록한다. 아마도 이 바다에서 내어주는 '죽은 (자들)'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과거 물로 심판받은 '다이몬'들을 포함할 것 같은데, '사망'과 '하데스'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이들도 불못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14절). 결국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사탄 마귀, 그리고 사망과 하데스까지 불못에 던져지고, 행위에 따라 심판 받는 모든 이들 즉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역시 불못에 던져진다. 이때부터 사망과 하데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후로는 사망이 없다. 즉 이 말은 천년 동안에는 땅의 백성들이 아직도 죽을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심판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음을 압니다. 다만 주는 공의로우시고 우리는 주의 은혜 아래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기기 위해 두려움을 내어 쫓고 싸움으로 나아감 (계 21:1-8)
모든 심판이 끝나고 요한이 본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그 처음 하늘과 그 처음 바다'는 사라졌는데, 요즘은 물리학적으로도 이러한 일이 발생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마도 물질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처음 옛 것에서 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졌음'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는데, 5절 원어는 '보라 (아오리스트형, 보시오) 내가 만물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 (만들다 poieo 현재진행형)'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창조하다'와는 다른 말로, 이미 있는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두번째로 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단장된 새 예루살렘이었는데, 단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이 새 예루살렘은 아름답게 단장되었는데, 그 모습이 '자기 남편을 위하여' 즉 자기 남편의 어떠함과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 준비되며 단장되었음을 말한다. 원래는 땅에 속해있던 인생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함으로 변화되고 하늘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누리며 하나님 혹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의 놀라운 새 예루살렘이 그냥 하늘에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내려 온다.
이것은 3절에도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한다. 과거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함께 있다'는 원어로 '함께 장막칠 것이다'로 되어 있는데, 과거 광야시대 단지 장막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던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원어로 장막치다)'라는 말씀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덮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 즉 '사람 anthropon'은 근원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계속 '처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처음 하늘, 처음 땅, '처음 것들'의 '처음'은 '옛'즉 '원래'라는 말과는 다르다. '원래'는 좋았고 아름다왔다. 하지만 마귀의 반란과 인류의 범죄로 모든 것이 '처음' 것이 되었고, '첫 사람' 아담 즉 인류는 범죄한 '아담류'가 되었다. 하지만 '둘째 사람'인 그리스도로 인해 이제 모든 것이 회복을 넘어 원래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으로 완성된다.
6절은 거의 모든 번역본들이 '이루었도다 (완성하다)' 정도로 번역했는데 '이루다'는 말도 그리 틀리지는 않았지만 원어는 '되다 ginomai'이며 3인칭 복수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즉 주님께서 다 이루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다 (원래 계획하신 대로) 되었다라는 의미로 본다. 그러면서 다시 당신에 대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그 샘으로부터 목 말라하는 자에게 값없이 줄것이다 이기고 있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긴 자'가 아니라 현재 '이기고 있는 자'이다. 이러한 이가 바로 온전히 '믿는 자'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기고 있는 자'의 반대말은 '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 먼저 '두려워 (하는 자들)'인데, 형용사 delio의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두려운' 혹은 '비겁한' 이라는 의미로 이기려면 싸워야 하는데, 그 대상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두려워하며 따라서 비겁하게 싸움을 피하며 타협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뒤 '믿지 않'기 때문인데, 역시 형용사로 '믿지 않는 (자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이기고 있는 자'는 개인적으로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힘을 주시지만, 이렇게 비겁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다수의 사람들로 주님과 관계 없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흉악한 자들'이 되는데 원어로 '가증하게 된'이라는 의미다. 믿지 않고 비겁한 이들은 그 삶의 여러면에서 가증하게 된다. 이들은 결국 마법을 좇고 우상을 숭배하는데, 진리를 거스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거짓말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삶 자체가 거짓이다. 이러한 상태로 끝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고 다시 회개케 해서 쓸 수 없다. 그들이 참예하게 될 몫은 '불못'이고 이것은 둘째 사망이다.
주님, 싸움을 싫어하고 회피하는 비겁한 이들이 되지 않고 이기며 또 정복하는 주의 백성 되게 하소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깨끗게 하소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을 수 없는 새 예루살렘,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룩해야 함 (계 21:9-27)
21장에서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할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이해해야할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지만, 우선 그 스케일 면에서 압도적이다. 16절의 기록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은 정육면체 형태인데, 번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원어는 개역개정과 비슷하다. '우리말 성경'은 가로 세로 높이 모두가 (각각) 12,000 스타디온이라고 했지만 원어에는 가로 세로가 같고 그 성의 크기가 12,000 스타디온이며 가로 세로 높이가 같다고 기록했다. 즉 이 말은 각 면의 길이가 12,000 스타디온이라기 보다는, 가로와 세로 네 면 모두를 합한 것이 12,000 스타디온이라는 의미같다. 그렇게 되면 한 면이 3,000 스타디온이며 이는 거의 600킬로미터 정도이다. 그러면 정육면체로는 약 2억 입방 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각 면의 길이를 12,000 스타디온으로 해석해서 거의 달 크기 정도로 풀이하는 것이 많은데, 이 새 예루살렘 성에는 동서남북에 문들이 있는, 즉 동서남북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북극점이나 남극점에 위치하지 않고 아마도 현재 예루살렘 정도의 위치할 것이다. 따라서 '새 땅'이 자전을 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처럼 자전을 한다면 물리학적으로 무리가 생길 듯 하다. 그래서 한면이 600킬로 정도가 되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한 면이 12,000 스타디온이던 아니면 3,000 스타디온이던 이러한 건물은 인간이 지을 수 없고, 특히 지구상의 모든 금을 다 모아도 맑은 유리처럼 반사하는 정금으로 이러한 성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이 성은 2절 처럼 다시 10절에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흥미로운 것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이 성을 보여주기 전에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말했는데, 즉 이 새 예루살렘 성이 바로 신부 혹은 어린 양의 아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새 예루살렘은 마치 신부가 단장한 것 처럼 금과 여러 보석과 진주 등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이러한 물질들은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만들어져 내려온다. 이것은 이 새 예루살렘에 인간의 어떠함이 하나도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마 6:10) 실현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각 문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쓰여 있지만, 12개의 기초석 즉 주춧돌에는 주님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것은 뒤바뀐 것 같아 보이는데, 원래 '기초'는 구약의 열두 지파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온 열두 제자들이 기초가 되는데, 이것은 태초부터 계신 그리스도의 그 기초를 닦은 이들이 열두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24-26절 역시 흥미로운데, 먼저 24절은 원어로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고 있다' 정도가 되며, 다시 26절은 '그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로 되어 있다. 만국은 그 빛 가운데 다닐 즉 생활할 것이지만 땅의 왕들은 만국의 영광을 가지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이며, 또 계속해서 왕래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여기에도 '만국'과 '땅의 왕들'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미 모든 악인들은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졌다. 따라서 여기 '땅의 왕들'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이들일 것이다. 27절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기라'고 말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만국'은 그 성 밖 땅에서 사는 것일까? 이것은 조금 궁금한 점이다. 22:15은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들은 모두 이미 불못에 던져지지 않았던가? 아니면 시간상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그들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성 안'과 '성 밖'이 있고, '성 밖'은 불못 외에는 없을 것 같은데, 아직도 '만국'이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불못 외에도 '새 땅' 즉 성 밖의 넓은 땅이 존재한다. 주님의 경륜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주님의 심판하심과 다스리심은 공의로우시다.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지난 8절과 앞으로 위 22:15 말씀도 있지만, 27절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를 언급한다. '속된 것'은 koinos로 '평범한, 속된, 세속의' 등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보통' 혹은 '정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이에 속하는데, 평범하게 남이 사는대로 따라 사는 것을 주님께서는 '속되다' 하신다. 이러한 '속된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가증한 일'과 '거짓말' '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인데, 사실 '속되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저급한 삶을 말하며, 이는 '거룩하다'와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 인간의 말이나 문화에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 말씀으로 저의 생각을 다시 한번 씻기 원합니다. 온전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신앙 생활, 교회 생활, 공동체 생활이 오늘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게 하소서.
우리가 택할 것 (계 22:1-11)
1절의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 모두 소유격에 단수인 '보좌'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과 '어린 양'은 하나임을 말한다. 그 보좌로부터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흘러 나오고 있다.
강은 길 가운데로 흘러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적실 것이다. 그런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강 좌우에 있으려면 적어도 둘 이상은 있어야 하지만 단수로 되어 있다. 특히 이 '나무'는 보통 잎사귀가 있고 열매가 맺히는 tree에 해당하는 단어인 dendron이 아니라 '막대기' 혹은 '십자가'를 말할 때 쓰는 xulon으로 되어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아직 끝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막대기 같은 곳으로부터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마치 구약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연상하게 한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라는 부분의 원어는 '매달 그 열매를 내고 있는데 열두 열매들을 맺고 있다' 정도로 되어 있어서 '종류' 혹은 '가지'라는 말은 없다. 즉 달마다 각기 다른 열매를 맺는다기 보다는 매달 한 열매를 낸다는 의미다. 여기에 소위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또 추가로 몇개 더 얹어서 설명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틀린 해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고 아가페이신 하나님은 오직 아가페를 내시며, 그 아가페에는 여러 방면이 있다. 마치 한 열매에 여러가지 맛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시 '만국 (혹은 민족들 ethno)'이라는 말이 나오며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는데도 이 '이방'을 의미하는 '민족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것이며, 그 생명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들을 치료할 것을 말씀한다. 그들에게 치료가 필요한 것은 믿는 이들이 소유한 그 기업 즉 하나님의 그 풍성하시고 영원한 생명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일텐데, 그러한 사람들이 아직도 '민족들'로서 존재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실 받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서 초기 성경이 구성될 때 요한 계시록을 포함해야 할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계시록은 분명 복음서, 그것도 매우 특별한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가 영안에서 보고 그대로 기록한 이상, 말씀 그대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시 말해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거룩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변화받은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4절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으로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기록한 고전 13:12 말씀이 이루어 진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각각 그 종들이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며 대표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고 온전히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맡아들 되시고 주님의 그 거룩하심을 온전히 닮아 믿는 우리들도 그때에는 아들들이 될 것이다.
5절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앞서 2절의 '만국'이 있어야 함을 설명하는데, '왕 노릇' 즉 원어로는 '다스리다'이며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필요한데 바로 이러한 만국을 세세토록 다스릴 것을 설명한다. 이제 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만국 역시 영생하는데, 그들의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으로가 아니라 생명나무 잎사귀의 치료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이들은 온전히 성화된 이들과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놀랍고 두려운 말씀을 보인 천사에게 다시 요한이 절하려고 하자 천사는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한다 (9절). 원어를 직역하면 '그러지 말라! 나는 그대와 그대의 형제들 그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의 동역자 입니다. 하나님께 절하세요' 정도가 된다. '그러지 말라'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자신에게 절하려는 요한을 급히 말리기 위한 것이라면, 천사 자신의 말대로 그는 요한이나 형제들 그리고 선지자들은 물론 말씀들을 지키는 모든 이들과 동일하게 일하는 동역자이다. 그래서 '절하세요'는 아오리스트 시제가 된다.
계속해서 '속히 되어질 일' 또 '속히 오고 있다' 또 10절의 '때가 가까우니라' 등의 말씀은 이미 2천년이 지난 현재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주님께서는 '속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2천년이나 기다리셨을까?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주님의 뜻 안에 있지만, 인간의 과오도 분명 있는데, 예를 들어 동방박사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먼저 헤롯궁으로 가서 주님의 태어나심을 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 처럼,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성경은 덮혀 있었고 일반인들에게 봉인되어 있었다.
11절은 원어로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게 두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며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둘지니라' 정도로 되어 있다. 여기 모두 '두고'라는 말이 있지만, '의로운 자'에 대해서는 '의를 행하게' 라고 되어 있다. 의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행함으로 완성된다.
이 구절은 운명론적으로 들리는데, 마치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의 느낌이다. 복음은 악인을 회개시켜서 의롭고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인데, 불의한 자나 더러운 자 등은 소망이 없다는 것 처럼 들린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증인으로서 살아야 하지만,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은 물론이고 복음을 왜곡시키며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먼저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며 그 안에 화평과 능력과 영광을 먼저 누려야 한다. 이러한 것이 없으면 다른 이들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오히려 우리가 미혹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외부에도 있지만 그 목적과 초점은 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것,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계속 나오는 두 가지 큰 줄기, 즉 옛 뱀과 그에 속한 타락한 천사들과 짐승들과 거짓 선지자와 세상 등 모든 것들 그리고 반대로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와 생명나무 주님의 동역자 그리고 주의 백성들 등 모든 거룩한 것들은 바로 이 '불의'와 '더러움' 그리고 '의로움'과 '거룩함' 사이에 우리가 양자택일 할 것이다.
주님, 성도들이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며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시고 계시록의 말씀을 오늘 열어 주시고 풀어 주소서. 주의 어떠하심 그 놀라우신 생명을 오늘 맛보게 하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고 계시옵소서 (계 22:12-21)
12절 '상'으로 번역한 말은 misthos로 '삯, 상, 보상, 벌' 즉 어떤 것에 대한 상당한 대응을 의미한다. 그래서 킹제임스역은 '보상'으로 번역했다. 만일 '상'만이라면 앞 11절 악한 이들에 대해서는 제외되는데, '보상'이라면 악한 것에 대해서는 벌로, 선한 것에 대해서는 상으로 주실 것을 말씀한다. 이러한 보상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주시는데, 계시록 1장부터 언급되는 이 '행위 ergon'가 이제 마지막 장까지 이어진다.
13절은 다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계 1:8에는 단지 '알파와 오메가요' 그리고 21:6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마지막에 와서는 '시작과 마침'이라는 구절이 추가된다. 이 말씀은 소위 '윤회'라는 사상이 거짓임을 폭로하며 모든 것에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마침이 있음을 말씀한다.
14절은 원어의 사본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기들의 두루마기들을 빠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꽤나 큰 것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 '두루마기 stole'는 '예복'을 의미하며 발까지 내려오는 매우 긴 옷이다. 이것은 내 자신의 어떠한 것이 아니라 '예복' 즉 주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는 말씀으로 우리를 두른다는 의미다. 즉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 주님의 명령들을 행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세상에 살며 더러워지는 그 옷을 빨아 희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지만 거기 속하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 1:27).
반면에 15절은 '그러나 그 개들과 그 점술가들과 그 음행자들과 그 살인자들과 그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을 좋아하고 있으며 지어내고 있는 그 모든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하는데, 이 모든 죄인들 앞에 '그 the'가 붙었다. 물론 이 '개들'은 생물학적인 개들이 아니라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무례하며 짖고 무는 불법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금수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급은 지금 이 계시록을 읽고 있는 이들 즉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믿는 이들에게 희망과 위안과 기쁨을 준다.
의아한 것은 21:8에는 이러한 이들이 불못에 던져질 것을 말씀하지만 여기에는 단지 (성) 밖에 있을 것을 말씀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불못에 던져지지 않고 다만 성 밖에으로 쫓겨날 것을 의미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앞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즉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이 당당히 '그 대문들을 지나 그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해 이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
16절은 '나 예수는 내 사자(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위에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다 나는 다윗의 그 뿌리 그리고 그 자손, 그 빛나고 이른 그 별이다'라고 기록하는데, 이제까지 '교회들'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즉 아마도 유대인들과는 이제 별로 관계가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말씀하시지만 여기는 구약의 '다윗의 그 뿌리 그리고 그 자손'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구약과 관계 없이 중간에 갑자기 등장한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시며 언약 안에서 예언되셨던 바로 그 분이시다. 주님의 그 영원한 왕국이 새롭게 펼쳐지지만 과거 다윗에 대한 영원한 왕위와 관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17절은 '그 영과 그 신부'가 읽는 이들을 초청하시는 말씀인데, 이 신부는 교회로서, 앞으로 미래의 우리 자신 즉 신부가 될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각자 한 사람은 보잘 것 없지만 성도들로 변화하여 단체로서 주님의 신부로 성장하면 그 위엄과 권위와 존귀는 그리스도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 영' 즉 성령과 함께 현재 우리를 초청하신다.
22장의 '오다'는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인데, 그래서 '오라'는 명령은 '오고 있으라!'로 번역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오고 있으라!'는 명령을 처음에는 '그 영과 그 신부'가 하시지만, 이제 그 명령을 들은 이들 또한 (다른 이들에게) 동일하게 '오고 있으라!'고 초청하라 명하신다. 택함을 입었던 아니던 간에 이러한 초청은 계속되어야 하는데, 초청 받은 이들이 생명수를 취하는 것은 그들에게 달렸다.
20절의 '속히 오리라' 역시 '내가 반드시 속히 오고 있다'인데, 그에 대한 성도들의 화답 역시 '아멘 주 예수여 오고 계시옵소서'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주님은 아직도 오지 않으셨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오고 계시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멀지 않으시고 가까우시다 (빌 4:5).
핵심: 이 계시록의 말씀들을 읽고 있는 자 그리고 듣고 있는 자들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행복하다. 이 말씀들을 읽는 것은 단수 동사로서 각자 개개인이 읽는다. 듣고 있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로서 함께 듣고 함께 지킨다. 흥미로운 것은 '지키다 (히 테이레오)'라는 말은 '행하다' '순종하다'라는 뜻 보다 '지키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즉 이 예언의 말씀들에 대해 우리가 행하는 것 이전에 읽고 듣고 우선은 지키고 보호하면 된다. 우리 마음에 두어 지키든지 글로 쓴 책을 지키든지 계속해서 읽고 듣기 위해 지켜야 한다. 사실 이 계시록의 내용에서 우리가 할 것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앞서 기록된 신약의 많은 책들에 있다. 이 예언의 말씀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더라고 계속 읽고 들어야 하는데, 이는 정작 우리의 행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