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나마에서 큐티를 나누다 보면 가끔 혹시 내가 나누기 위해서 큐티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설교를 업으로 하는 목회자들이나, 업은 아니라도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 성경교사 혹은 다락방 장 등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가 바로 말씀을 읽을 때 자신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남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지기 쉽다는 것이고, 그래서 ‘써먹을’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과 고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먼저 내 자신이 읽고 깨닫고 누리고 은혜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나누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없는데 나누려고 하는 것은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되고 동시에 그 나눔에는 생명과 은혜가 없지만, 분명한 누림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데 나누지 않는 것 또한 영적으로 묵임이 된다.

역사적으로 천주교의 큰 업적은 성경을 '지킨' 것이었는데, 이것이 동시에 치명적인 잘못이 된 것은 지키기만 했지 말씀을 공개하거나 나누지 않은, 혹은 성도들 간에 나눔을 (교제, 코이노니아) 막았다는 것이었다.  능력과 확신이 있을 때는 오픈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닫고 막게 된다.

끼리끼리 놀 수 밖에 없던 나병 환자 넷은 굶어죽느니 가서 ‘꼴에’ 항복하겠다고 적진을 방문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오던 같은 시간에 적진에서 혼란을 일으키셔서 모두 혼비백산 도망하게 하셨다.  오비이락인지 아니면 정말 그 넷의 떠드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게 하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병 환자 넷은 모두가 물러간 자리에 남은 음식과 의복으로 ‘먹고 입는’ 문제에서 해결함 받고 큰 누림을 얻는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로 옷 '입음'을 말하는데, 그것이 현실이 될 때, 그 누림은 우리에게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온다.  정말 구원받았다면, 정말 은혜받았다면, 정말 누림이 있다면, 제일 먼저 생각에 찾아오는 것은 바로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이웃의 구원이다.  그리고 나누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거룩한 부담이 생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나병환자였다.  사마리아 여인도 내세울 것 없고 어떤 이유에서든 부끄러운 과거가 있으며, 예수님 제자들 조차도 신학교 입학은 커녕 주님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역을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주님을 만남으로 그 은혜를 누림으로 시작한다.  나는 나병환자이며 사마리아 여인이며 또 실수가 가득한 주님의 제자들과 같지만 그 받은 은혜를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주께서 나의 누림이 되셨기 때문이다.  

주님, 아담은 침묵하고 남자는 비겁합니다.  제자들은 실수 투성이고 나병환자는 남에게 병을 전염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하고 있다면 벌이 임할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가 큼을 인해 오늘도 나누게 하소서.  아비로서 디지털 세대 아이들을 어떻게 주님께 인도하고 본을 보일까 고심합니다.  과거 바르지 못한, 나병 환자같은 모습을 보인 것도 기억하고 후회합니다.  하지만 주의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나누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