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여서 침묵은 소극적인 거짓말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적극적인 거짓말이다.  죄도 이와 같아서 적극적으로 짓는 죄가 있고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것도 있다.  

‘여호와를 높이다’ 혹은 ‘여호와는 높임받다’라는 뜻의 ‘여호람’은 누가 그런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모르지만 그 ‘높임’에 한계를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 주상을 없앴지만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했다.  그는 왜 아버지가 만든 바알 주상을 없앴을까?  아마도 우상숭배는 미신이라는 합리성에 입각한 판단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여호와를 높이는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를 높이는 것은 그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인데, 그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렇게 심각한가?  그것은 이미 완성된 하나의 성전을 무시하고 분리되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은혜 시대의 하나의 성전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OO교회라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개개인의 삶 그리고 공동체의 삶 속에서이다.  이것을 떠날 때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는 계속된다.  교회는 나뉠 수 없고 주님의 몸이 온전히 하나임을 고백하고 그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킬 때, 그리고 돌아갈 때, 소극적인 것에서 떠나 이 세대에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를 떠날 수 있다.

주님, 제 개인적인 죄의 문제도 분명 있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의와 교만과 불순종이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에서 떠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게 하시고,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이시듯, 주님께서 ‘저들도 하나가 되어’라고 기도하셨듯,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기도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거룩한 분과 한을 품게 하소서.  하나를 떠나는 이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의 확신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