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나 손자병법의 손자가 오늘 말씀의 전투가 전개되는 상황을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 같은 북이스라엘 진지와, 반면 땅에 가득했던 아람 진영.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구약의 다른 여러 전쟁이나 전투의 기록은 그래도 승리의 이유를 나름 기술하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한 것은 첫째로는 여호와의 이름이 먼저였지만, 승리의 매개체였던 물매질은 요즘으로 하면 총알 같은 위력이 있어서 원거리의 골리앗을 쳐 죽게까지 만든 임팩트는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또 어떤 때에는 적군의 눈이 멀게되는 기적이 있었다.  물론 여리고 성에서의 승리도 기적이지만, 적어도 성 주위를 돌았다는 기록이라도 있다.  그런데 오늘 경우는 그 전투의 내용이나 승리의 방법에 대해 전혀 기술하지 않는다.  물론 성벽이 넘어져서 2만7천이 죽는 얘기는 있지만, 10만 대군을 적은 염소 떼가 도륙하는 얘기에 대해서는 도무지 어떻게 가능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영적 전쟁이나 승리가 이런 것 같다.  전혀 상대가 되지도 않고 그 되어지는 경과나 방법도 분명하지가 않고, 물론 기도는 하지만 어떤 설명이 가능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결국 배우게 되는 것은 나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영성 등 나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된다.  계시록의 ‘이기는 자’ 혹은 ‘정복하는 자’는 그래서 나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그리고 입술의 고백으로 이겼음을 알게 된다 (계 12:11). 

구약에서는 물리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한 모형을 보여준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 죄에 대해서는 요한과 바울이 상대적으로 다르게 말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사실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요일 3:9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기록하며 마치 한번 구원 받으면 죄를 지을 수 없고 뭐든 다 죄가 아니다 라는 것처럼 말한다.  아마 구원파가 이런 식으로 말하나 보다.  하지만 동일한 요한 일서 1:6-10, 특히9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하며 믿는 자들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요일 3:9는 우선 ‘하나님께로서 난 자’ 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해 둠으로 죄 즉 ‘하마르티아, (목적을 상실하는 문제)’는 하나님께로서 나면 해결된 것으로 분명히 한다.  그런데 그 말씀을 원어로 보면 ‘죄를 짓지’라는 말이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  즉 영어로는 ‘commit sin’ 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항상 죄를 짓고 죄에 투신한다는 말이다.  즉 죄인으로 나서 그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목적을 상실하고 맘대로 행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생명은 죄에 투신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생명 즉 ‘하나님의 씨’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며 죄를 짓게 되는데, 1장 10절의 ‘범죄하지’ 라는 단어는 ‘하마르티아’의 동사형이다.  즉 우리의 삶 자체나 그 목적이 죄가 아니라 살면서 범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처음 회심할 때 단 한번 근본적인 회개가 있지만, 날마다 회개와 고백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시 ‘사귐’이 있게 된다 (요일 1:6). 

바울은 죄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실존적으로 설명하고, 죄는 마치 인격이 있고 살아 있어서 우리의 의지 까지도 그 아래 있게 하는 매우 강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항상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롬 7:23-25).  그런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 수 밖에 없지만, 이 육신이 죽은 것으로 여기며 (롬 6:11), ‘믿음 안의 육체 안에서 살게 (원어)’ 되는 것이 필요한데 (갈 2:20), 그것의 비밀은 바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당신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사는 믿음 안의 육체 안에서 살게 (원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결국은 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향한 믿음이 전부이며 그것은 설명과 이해를 뛰어 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밀스러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나아가 히 12:4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바울이라고 할 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라고 말한다.  죄를 대항해 싸우는 것이 왜 피를 흘리는 것이 필요할까?  주님이 벌써 피를 다 흘리시지 않으셨나?  주님께서 흘리신 피는 대속의 피지만 우리가 '흘리는' 피는 결코 대속의 피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죄와 대항해 싸우는 것에 대해 피흘리는 것이 필요한가?  원어를 잘 보면 피 ‘흘리는’ 이라는 말은 없다.  원어에는 ‘피까지’로 되어 있다.  즉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까지는 대항하지 않아 왔다’ 라는 말이다.  물론 ‘까지’라는 말 ‘멕흐리’는 as far as 혹은 until 이라는 뜻이기에 ‘피 흘리기까지’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것은 은유적 표현 같다.

결국 12:4 구절은 오늘 말씀의 핵심인 ‘뿌리까지 제거해야 할 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는 생명체라서 기회만 되면 자라고 뛰쳐 나온다.  그래서 ‘피 흘리기 까지’ 정도로 투철하게 대항해야 함을 말씀한다.  아합과 같이 죄에 대해 ‘너는 나의 형제다’ 라고 한다면 내가 술을 마시다 술이 나를 마시게 되는 것 같이 언젠가는 죄에 다시 사로 잡히게 된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거듭난 생명이라 해도 방심하면 마음이 무디어지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지게 된다.  회개와 고백이 필요하다.

주님, 주와 사귐으로 돌아가는 귀한 방법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안과 밖을 아시오니 주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를 감찰 하시고 숨어있는 것들을 드러내시며 그 것들에 대해 피흘리기까지 철저히 고백하며 제거하게 하소서.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