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하나님, 선지자, 말씀 등의 영적인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어느 고대의 전쟁이 시작되는 상황을 기술한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해설에서 처럼 겸손이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장면 역시 나오지 않는다.  특히 아합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겸손하거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금 cheating을 하자면 내일자 말씀에 선지자의 말에 따르는 아합을 보게 되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얻게 되는데, 오늘 말씀만 보자면 전혀 그런 영적인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뒤에서 일하고 계신다.

전혀 영적이지 않아 보이는 일상 생활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을 위해 그 가운데 임재하시고 항상 역사하고 계신다.  더우기 아합 같이 악한 왕이 이끄는 당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일하시고 승리를 가져 오신다.  도무지 무슨 조화인가…  실패한 지도자나 타락한 목회자들이 생겨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계속해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신다.  

요즘 다시 느끼는 것은 (혹은 인식하는 것은) 그리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냥 교회에 설렁설렁 다니거나, 사역을 해도 문제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 사람들도 또 다시 보면 괜찮은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도 그러니까. ㅎㅎ)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빌 2:3) 한다는 말씀은 ‘그냥 될 수 있으면 남들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해주자,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좋게 생각해라’ 가 아니다.  그리 영적이지 않아 보이는 분들도 다시 자세히 보면 내가 전에 보지 못한 훌륭한 점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다.  

그런데 ‘나보다 낫겠지’ 라고 생각해 버리면 동일한 은혜가 필요한 그들에게 내 맘 속으로 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다는 좀 더 많은 기대와 요구를 바라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은혜 아래 있는 자인 것 처럼 그들도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고 결국 나는 은혜 없이는 답이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은혜가 필요하지만 은혜를 겸손히 받는 이들이 있고 걷어차 버리는 이들이 있다.  나는 오늘 겸손히 그 은혜 밑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런데 왜 ‘겸손’으로 큐티가 가지?  아마도 오만방자한 벤하닷이 반면교사가 되나보다.  벤하닷이라는 이름에서 ‘벤’은 ‘벤허’ 처럼 아들이라는 뜻, 즉 ‘하닷의 아들’ 이라는 뜻인데 ‘하닷 הדד ’이라는 말은 찾아보니 ‘고함치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장대비, 큰 파도 소리’ 등의 뜻이라고 한다.  즉 영어로 make a fuss라는 것 같은데, 야단법석을 친다는 말이다.  야단법석을 치며 주위의 왕들을 포섭해서 힘을 기르면 마치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양 자신을 속이게 된다.  그런 벤하닷처럼 그런 오만이 내 속에도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많은 이들의 칭송이 있으면 좋겠고 나를 따르면 좋겠다.  그런데 결국 그 근원은 오만이다.  이것도 은혜가 필요하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 은혜가 되시고 회복이 되십니다.  나의 모든 부끄러운 면들을 은혜 밑으로 숨깁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임을 고백하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