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매일 경험하고 살았음에도 정작 아들이 죽자 그러한 기적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시지만 동시에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시다. 믿는 이거나 아니거나 사업 성공 혹은 실패에는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사업을 하는 방법과 이익을 어떻게 분배하고 쓰는 가에 있겠다. 병고치는 문제 역시 착하고 믿는 사람이라고 병이 모두 낫는 것이 아니고 악한 사람이라고 모두 병들어 죽지는 않는다. 세월호 안에 갖혀 죽임을 당했던 학생들 중에 믿는 이들이라고 물 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 보니 지난 세월 경험했던 많은 은혜의 순간 그리고 기적의 일들이 지금 와서는 옛기억으로만 남게 된다. 직장을 구했던 기쁨도, 그 때 서원했던 것도 이제는 현실에 익숙해져서 모두 잊어 버렸다. 물론 순간 순간 기억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삶 속에서의 경험들만으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죽음과 생명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다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죽음 앞에서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종교가 생겼고 '윤회'라는 사상도 생겨났지만 참된 종교는 생명을 줄 수 있는 종교다. 사실 기독교는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 보다 훨씬 고상하다. 예수님이 바로 진리고 생명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사역 중에 정작 생명을 위한 사역이 있는지 혹은 많은 사역들이 모두 생명을 위한 것인지, 살리는 것인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지난 선교의 역사를 보면 대개의 경우 잘 사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에 들어가서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교육과 의료 그리고 구제 등에 관한 사업을 활발히 함으로 포교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사역은 그러한 교육 의료 구제 등의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역이다. 복음이 들어가서 그들 스스로가 속으로 부터 회개하고 거듭나서 변화하고 열매맺게 하는 사역이 주님의 사역이다. 주님께서도 많은 이들의 병을 고치시고 사람들을 먹이시고 하셨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반응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를 명하셨고 주님은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막 1:38)’ 셨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사업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사명이 우선이다. 사회사업은 궁극적으로 복음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또 한 면으로는 ‘복음’만을 위한다며 독재정권에 비굴하게 굴었던 모습도 기억한다. 정작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교회라는 안정된 종교적 울타리 속에서 우리 만의 안전장치로 복음을 취급해 오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다 (마 11:5, 눅 4:18, 눅 7:22, 사 61:1). 나는 아직도 복음을 받을 수 있게 가난한가. 주님 없이도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지 않는가. 하지만 나도 그리고 모든 이들이 언젠가는 숨이 끊어질 것이라는 진리를 부인하지는 못한다.
예전에는 문학의 밤이니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행사 등을 통해 교회가 인근 사람들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했었다. 하지만 세상 오락이 월등히 앞서 나가는 지금 특히 셀폰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지금에 교회는 세상이 제공하는 혹은 그보다 재미있는 문화나 오락은 제공할 수 없다.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살리는 사역이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발견하고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며 (고전 14:24-25)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쁨,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과부는 아들과 마지막 먹고 죽을 것을 드리는 순종을 함으로 끊이지 않는 가루와 기름을 공급받았지만 정작 아들이 죽자 그에게 있어 먹고 사는 것 보다는 아들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단지 아무 것도 의지할 데 없는 과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 그에게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경험이었다. 나의 깊은 바람과 필요는 무엇인가. 생명이다. 오직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시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이시다.
주님, 오늘도 생명을 부어주소서. 먹고 사는 문제, 여러 이해관계, 풀리지 않은 문제들, 여러 사건들이 흩어져 있지만 그 가운데가 사망의 골짜기일 수도 있고 오히려 생명이 풍성한 초장이 될 수도 있음을 압니다. 여인의 고백처럼 나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이시고 지금 나에게 생명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