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많은 설교자들이나 부흥사들이 순종에 대한 주제의 설교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본문이고, 생명의 삶 해설 역시 순종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언을 했고, 사르밧 혹은 사렙다 과부 역시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자기와 아들이 먹고 죽을 마지막 음식 일부를 ( 전부도 아니고) 엘리야에게 주었더니 그 후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언급하신다.  눅 4:25-27에서는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고 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화를 내며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즉 주님은 이 사건에 대해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에 촛점을 두신다.  결국 아무리 순종하려고 해도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순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순종이 쓸데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그것이 좀 더 분명하게 나오는데 9절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고 하시며 이 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신다.  그냥 운좋게 그 과부가 걸린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 중에 무작위로 선택된 것도 아니라 주님께서 주관적으로 특정 과부 하나를 선택하셨다.

오늘 본문을 어거지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들면 좀 우습게 되어 버릴 수 있는데, 엘리야의 경우 시냇가로 피했을 때 까마귀가 먹을 것을 날라 준 것 처럼 믿는 이들 혹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들에게는 세계적인 불황이나 불경기가 와도 하나님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해 주시며 특히 하나님 말씀을 받고 전하는 사람은 사렙다 과부같은 이를 붙여 주셔서 연명하게 하신다 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 사업을 하고 있다면 다른 모든 사업들이 고전하고 망하고 부도가 나도 내 기업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하며 또 항상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과부처럼 순종하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안전하게 해 주신다 라고 비현실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독교 기업을 표방하고 그렇게 운영하려고 노력해도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망할 수도 있다.  또 마지막 남은 돈을 헌금했다고 자동으로 항상 은행계좌가 채워지지 않는다.  참된 주의 종의 삶은 엘리야의 모습 처럼 가까스로 연명하며 살 때가 많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순종했더니 복을 받았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주님의 주권과 그 안에서 나와의 관계, 즉 언약적이고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순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기회가 없기에 순종할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나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된다면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지만 순종보다는 사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선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관계 자체가 바로 진정한 예배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 분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창세전에 택하셨기 때문이다.

어제 밤에도 생각했었지만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상처가 많을까?  특히 나를 포함해서 기독교인들은 맨날 상처 받았다고 하고 주일 설교 중 많은 경우 위로의 말씀이 주제가 되는 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그리스도의 풍성하시고 탁월하심 또 주님의 성취하심 같은 주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이민생활이 힘들지만 우리의 상처와 부족함에 촛점을 맞추면 항상 부정적인 것에 주목하게 되고 그에 대한 치유책에 관심을 갖게 되며 자연히 부부관계 및 자녀들과의 관계 개선 등이 신앙 생활에 우선이 되고 목적이 되어 버린다.  마치 가정의 평화와 서로에게 주고 받은 상처의 치유를 위해 주님을 믿는 것 같게 되어 버린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가정과 관계와 상처에 관심을 가지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지만 주님의 지상명령은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고 상처주지 말아라’ 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  ‘증인의 삶을 살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먼저 증인이 되면 가정에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기 보다 가정에 평화를 이뤄야 증인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신체적인 병에 대한 치유는 많이 하셨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셨다는 대목은 찾기 어렵다.  사실 많은 경우 둘은 연관되어 있고 결국 마음의 상처는 죄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만지신 부분이다.  서신서를 보더라도 히 12:15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에서 ‘쓴 뿌리’를 언급함으로 심리적 혹은 심적 상처를 다루고 그 문제가 간과할 수 있는 작은 것이 아님도 말하기는 하지만 요새처럼 횡행하는 ‘심적 치유’ 혹은 ‘과거와의 화해’ 등을 주목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상처 치유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를 가져온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모든 묶임에서 자유하게 한다. 

주님, 나의 묶임을 주목하지 않게 하소서.  바울처럼 묶였음에도 자유할 수 있었던 그 비밀을 깨닫게 하소서.  가정과 환경이 완전치 못하다고 의기소침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께 아룀으로 온전히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하소서.  내가 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나의 노력이나 순종이 먼저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주도적인 언약과 택하심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