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쓴 목적 중 하나는 방대한 작품을 쓰면서 사람들로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자신의 책에 대해 분석하려는 의도에 대해 조소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모르고 또 그렇게 두꺼운 책은 쳐다 보기도 싫지만 (ㅎㅎ) 특정한 주인공도 없고 등장인물만 599명에 권당 500페이지 세 권으로 되어 있다는 그 작품은 아마도 성경 특히 구약에서 많은 모티프를 얻었을 것 같다.

오늘 큐티 짧은 본문을 몇 번 읽었지만 잘 이해도 안되고 등장 인물이 5-6명 나오는데 악당 여로보암 빼놓고는 누가 누군지 이제 좀 헷갈린다.  현재 출석하는 ANC의 담임목사님이신 유모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4천 명 넘는 교인들의 이름을 다 외우신다는 것이다 (외우는 척 하시는 건가? ㅎㅎ)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이름도 순간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다.  흠.. ㅠㅠ  아무튼 구약 특히 열왕기 역대기 등등은 왕들 이름과 지역, 그리고 북이스라엘 남유다 등 여러가지 것들이 등장해서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오늘 제목 ‘죄악의 대물림 결과는 심판입니다’ 라는 것이 구약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  구약의 많은 왕들이 악한 일을 되물림 하고 거기에 따른 심판이 따라온다.

이러한 ‘되물림’을 ‘가계의 저주’라는 것으로 해석한 책들이 두 권 있는데, 이 아무개 목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라는 책과 Marilyn Hickey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원제Break the Generation Curse)’ 라는 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책들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가계 저주에 대한 언급이 꽤 있었다.  아무튼 이 두 권 모두 복음주의권에서는 부정적인 서평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두 권의 책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경에서는 많은 비슷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에 대해 왜 후손인 우리가 그 결과를 뒤집어 썼는가?  왜 우리 모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주장에 수긍이 간다.  하지만 그것을 ‘복과 저주’의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무리가 있다.  역시 성경 여러 곳에서 그와 반대되는 상황, 즉 악한 부모를 두어도 여호와 앞에 온전히 행한 인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정신분석’ 하면 ‘무의식’ 세계를 소개하여 심리학의 흐름을 바꾼 프로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릴 적 나의 모든 경험이 지금 나의 삶과 존재에 영향을 미쳐서 원인 모를 두려움,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어떤 일에 대한 나의 반응 혹은 행동 등에 영향을 미치므로, 그러한 숨겨지고 잊혀진 것들을 찾아내고 분석하여, 그 원인을 맞대고 치료하는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그러한 '치유' 방법이 기독교 상담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인정을 구하게 되는데, 이때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예를 들어 할머니라든지 아니면 선생님이라든지 다른 좋은 분을 만나게 되면 건강한 정신을 계발하고 성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면이 나에게 있다고 옆에 사는 누가 그런다 (나는 부정한다 ㅎㅎ).  그런데 사실 이러한 면이 나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걸 읽으신다면 서운해 하거나 화내실지도 모르지만 많은 한국인 아버지들은 혹시 자녀들이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거나 혹은 버릇없어 질까봐 칭찬과 인정에 후하지 않다.  그런데 살다보니 나 역시 큰 녀석에게 그런 것 같다.  특히 작은 녀석과 비교해서 나를 답답하게 할 경우에 더 그렇다.

어느 날 무심코 큰 녀석에게 ‘네가 잘 하는게 뭐냐?’ 라고 핀잔을 줬는데 즉시 속으로 ‘아차!’ 했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 큰 아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과 더 잘하게 해야 한다 라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내 기억으로는 얼마 안 있어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러한 경험은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서는 온전한 치유가 쉽지 않음을 내 자신도 경험하고 있다.  무엇보다 관계상 서먹해 지게 된다.  그래서 계속해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인정해 주고 해야 회복 되는데, 결과적으로 계속 힘들어 하고 특히 사춘기를 지나며 말을 안듣는 것과 겹치게 되면 환장하게 된다.  난 어릴 때 이러지 않았는데 하며…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경험에 대해 다시 기억해 내고 ‘분석’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  주님께서 사람들을 고치실 때 ‘네 과거를 한번 떠올려 보려므나.  혹시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지 않았니?  아니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 경험은 없었니?  혹시 가난했던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꼈었니?  하나하나 짚어보자’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네 죄를 사했다’ 라고 선포하셨고 귀신이 떠나고 병이 나았다.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죄’임을 드러내신다.  

물론 나의 과오와 상처에 대해 그냥 책임없이 모두 덮고 잊어버리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나의 과오나 원인 모를 두려움 등에 대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잘못된 것은 주님 앞에 가져가서 다루심을 받아야 할 필요는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분석’이라기 보다는 ‘회개’요 말씀 앞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나의 모든 상처와 수치심에 대한 치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면 충분해야 한다.  그리고 충분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이 모든 부정적인 것과 저주, 죄들 그리고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가계의 저주가 혹시 있더라도 그러한 저주에 대해, 율법에 대해 우리 자신이 완전히 끝났음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 아니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아직도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살아오며 실패하고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이며 상처등에서 온전히 해방받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다윗의 고백처럼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전 2:10에서는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 말씀한다.  그리고 또 사람의 영에 대해 말씀한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성령이 통달하시듯, 우리의 영도 우리의 현실을 제일 잘 알고 그것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롬 8:26에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하며 우리의 깊은 부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성령께서 만지시고 일하심을 보여준다. 
 
우리가 할 수 없는 분석을 그치자.  톨스토이의 책보다 복잡한 나의 인생을 어떻게 분석하랴...  그러한 분석은 성령께 맡기자.  분석해봤자 나의 부모, 나와 아내 그리고 나의 자녀들은 모두 나쁘고 약한 죄인으로 밖에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 아래에 있’게 되셨고 (갈 3:13), 이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선포한다!

그래서 선포해야 한다.  정신을 분석하고 심리적인 ‘치유’ 보다는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것을 붙들고 그것이 진리이며 실재임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이기는 길이다.

그래서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것, 주 안에서의 올바른 교육은 나 자신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기쁨으로 인내하며 사는 지를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증인의 삶’을 먼저 사는 것이 참된 교육이다.

주님, 내가 가진 원인 모를 두려움과 어두움에 대해 주님의 말씀으로 비추소서.  그 이유와 원인을 드러내시고,  그러한 것들이 거짓임을 깨닫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 자유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소서.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왜냐 하면 ‘이전 것은 지났으니!’ 라며 담대하게 외치게 하소서.  내가 나의 자녀들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었던 것들, 그리고 그에 따라 생각나는 나의 부모에 대한 슬프고 가슴 아픈 기억들에 대해 모두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하심과 다루심을 구하며, 이미 은혜로 모든 것이 해결 됐음을 붙잡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