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고 부탁한다.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여러보암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선지자의 말 즉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고 여호와는 더 이상 자신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사람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한다.  

유일신이신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으면 불신자가 될 것 같은데 실은 다신론 혹은 범신론자가 된다.  다른 여러 이름과 여러 모습의 것들이 그에게 신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행복과 안위와 기쁨과 삶의 의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많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신이 되버린다.  많은 이들에게는 돈이요, 어떤 이들에게는 지식이나 과학, 혹은 선한 일이나 정의로운 모습이 신이 될 수도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죽일 수 있는 열심과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잊은 여로보암에게 있어 그의 신은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였다.  그래서 여러 신상과 산당들을 세우고 금 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고, 원하는 이들에게 맘대로 제사장직을 맡기며 그를 따르는 열 지파의 백성들의 인기를 구걸했다.  그는 왕이 될 명분이 없었고 다윗의 집안이 민심을 잃은 기회를 통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마치 사울처럼 항상 자신의 왕권을 백성들의 인기를 통해 해석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인기가 그의 신이었다.  여호와는 잊혀진 ‘네 하나님’이 되었다.

믿는 이들 혹은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갈릴 때 마치 서로 전혀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싸운다.  같은 예수님을 믿는 상대에 대해 ‘네 하나님’ ‘네 예수’라고 말하는 것 처럼 들린다.  하지만 보통 양쪽 모두 ‘손이 마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전에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다시 한번 뒤돌아 봐야 한다.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청해야 한다.  모든 기득권과 이해관계를 초월한 위치에 있는 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이 보내시지만, 그를 만나게 될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 그러한 이를 우리 가운데 보내소서.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건 구약 경륜에 가깝다.  신약에서 믿는 이들이 서로 다툰 예는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인데, 행 15:39에서는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라고 하며 이 싸움의 원인이 마가임을 말한다.  바울도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고 바나바 역시 당시 바울 버금가는, 아니 바울보더 더 영향력 있는 교회의 지도자였는데 이 둘이 ‘심히 다툰다’ 그리고 ‘갈라선다.’  이상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은 별 말씀이 없으시다.  교회의 영향력 있는 두 지도자가 갈라 섰는데 정작 주님께서 경고나 권유를 하셨다는 기록이 없다.

어떤 이들은 그 사건에 대해 후에 '인정에 이끌려' 자신의 조카를 천거한 바나바와 그 사역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셨다고 해석하지만, 그 후에도 바나바에 대한 기록은 계속 나온다.  나중에 이 일에 대한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갈 2:1에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라는 기록으로 보아 바울과 바나바는 화해한 것 같다.  물론 갈라디아서 기록연대가 확실치 않아서 그러한 동역이 갈리기 전이었는지 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4년이나 지난 것을 언급한 것 보면 후에 화해하고 다시 동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바나바가 사역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 전도자인 (고전 9:6) 것에 대해 동질감이 있었고, 많은 경우 함께 다닌 것 같다 (갈 2:9).  그리고 문제의 핵심이었던 마가에 대해 후에는 그를 인정하며 동역한다.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 ‘…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 4:10)’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울 수도 있다.  유치한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진리의 수호를 위해, 서로 더 섬기기 위해, 더 열심으로 ‘분’까지 내면서 싸우는 거라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전파된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빌 1:15)’  ‘…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7, 18)’

아무튼 ‘네 하나님’이 아닌 ‘우리 아버지’ 아래 있다면 결국은 예수 이름 안에서 온전히 한 형제됨을 알고, 교파와 교리와 출신과 나아가 성격의 차이까지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결국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형제들임을 알고 서로 인정할 때 가능하네요.  그리스도의 몸이 나뉠 수 없다고 말하셨지만, 갈리고 또 갈린 기독교를 봅니다.  하지만 나뉠 수 없는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만의 소유고, 예수 이름 안에 하나임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나 보기에 조금 모자라고 또 달라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먼저 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마음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