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치 없고 명분 없는 싸움도 많다.  도무지 양방에 아무런 이득도 없는 싸움을 상황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존심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결국에는 국가간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는 예는 역사적으로 많다. (물론 다른 여러가지 숨은 이유가 있지만) 르호보암 역시 돌아와서 이스라엘에서 당한 수모를 갚고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려고 유다와 베냐민에서 사람을 모으니 18만 명이나 모인다.  물론 이들은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 (21절)’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동족상잔이다.  하나님께서는 스마야라는 별 존재감 없는 선지자를 통해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 말라,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신기하게도 왕과 백성들을 순종한다.  아마도 어차피 싸워봤자 양방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르호보암의 이런 순종은 매우 가치 있다.

주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묻자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고 대답하신다.  주님에게 있어 ‘가라지 뽑기’는 별 가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고 말씀하시며 알곡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신다.  가라지에 대해 오히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즉 '자라게 두라'고 말씀하시며,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결론을 맺으신다.

요즘 계속해서 이단에 대해 야단들이다.  물론 큰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이단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정죄와 비판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지들끼리’ 치고 박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더우기 몇 몇 대형교회 및 목회자들의 실수가 드러나며 교회끼리도 서로 욕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알곡’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등진다.  

아.. 물론 쉽지 않은 문제다.  은혜는 항상 덮어만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죄나 이단적인 것을 덮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어떠한 결과가 보일지 생각하면 안타깝다.  교회끼리 갈리는 가운데 내가 알기론 증산도나 이슬람 쪽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물론 이단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싸움은 가치가 있어야 하고 향방을 확실히 해야 한다.  엡 6:12에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을 말씀한다.  즉 교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더럽고 악한 것들이고,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