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르호보암이어서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로몬의 지혜는 없을지라도 아마도 르호보암은 아버지가 생전 많은 결정 사항에 대해 시간을 끌거나 신하들과 더불어 의논했던 것을 봐와서 였는지 스스로 혼자 결정하지 않고 말미를 갖고 우선 선대의 신하들과 의논을 청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왕에게 달렸기에 장로들의 진심어린 충고보다는 경험없고 철없는 동무들의 의견에 따르는 실수를 범한다.

만약 내가 르호보암이었다면 장로들의 충고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 아버지는 후궁에 첩이 천 명이나 있고 금으로 두른 상아 보좌에 앉아 매일 맛있는 것만 먹고 생을 즐기며,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하고 살았다.  그런데 너희는 나보고 백성들의 눈치만 보라고?’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한다면 무슨 왕이람?  그런 왕을 뭣하러 해? 라고 했을 것이다.

세상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 중 분명 백성들을 위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이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권력을 얻고 나면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는 결정을 하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치인들의 술자리에 공공연하게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은 정치인들이 소위 3S를 좋아한다는 것이란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정치인들이 3S 즉 Sports Sex Screen을 좋아하고, 동시에 3S 정책 즉 이러한 것들로 국민들을 우매하게 만들면 정치가 수월해진다는 말들을 많이 했었다.  아닌게 아니라 1980년 초 전두환 집권 후 미디어에 대한 정책은 완전히 바뀌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6)’ 이라 밝힌다.  왕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러기 위해 왕이 되기 원한다면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주님과 왕노릇할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사람들을 섬기고 또 서로 섬겨야 함을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5-26)’ 고 말씀하시며 교회에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임을 밝히 말씀하신다.  우리는 섬김으로 다스린다.  이 역설의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말 그대로 받고 실천해야 하는데, 아직도 '3S'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나를 본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가지고는 제대로 섬길 수 없다.  

가정에서 아비는 다스리는 자이지만,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섬기라고 하신다.  섬기는게 무슨 왕이람?  하지만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 섬기기 원한다.  유치한 섬김일지 모르지만 설겆이도 오랜만에 해보고, 청소도 자주 하지만 오늘은 더 기쁜 마음으로 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섬길 수 있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주님, 도우소서.  나의 자존심이 튀어나와 섬기는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하소서.  식모요, 의사요, 선생이요, 노비인 어미의 모습과 같이, 섬기는 아름다움이 내 삶 속에 있게 하소서.  아이들이나 아내가 말 듣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섬기는 모습을 먼저 보이는 오늘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