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말의 ‘하늘’은 그 자체가 복수여서 ‘하늘들’이다. 그래서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에서 ‘천지’도 ‘하늘들과 땅’이다. 단어 자체가 복수인데, ‘하나님’이라는 단어 ‘엘로힘’ 역시 자체는 복수지만 단수로 취급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영어에도 이런 단어들이 몇 있는데 그 중 people 이라는 단어도 있고, fish 라는 단어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복수 단어 자체에 s를 붙이면 ‘여러 종류’의 뜻이 된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이 땅은 물론 하늘과 또 하늘들의 하늘 조차도 담을 수 없는 크신 분임을 고백한다. 이사야 40:12에서는 하나님께서 ‘뼘으로 하늘을 재었’다고 말씀한다.
고대 히브리인의 보편적인 우주관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늘’이라는 단어를 굳이 복수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밤 하늘이 다르고 낮 하늘이 달라서도 그랬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솔로몬은 그 지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수 없이 많은 은하계와 그 너머의 또 다른 차원의 ‘하늘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러한 하늘들과 여러 하늘들의 하늘들 조차도 하나님 보다 크지 않다고 말한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팽창 역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의 지혜로도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든 땅위의 건축물 따위가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아니라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 (29절)’는 곳이다. 그래서 사실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솔로몬은 28절 부터 기도를 시작하며 성전을 향하여 주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 들으시기를 간구한다. 그 어떤 기도보다 먼저 ‘사하심’을 놓고 기도하며 기도로 무언가를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구한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회복된다.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고 그를 통해 아버지께로 온다. 하늘에 아버지신 유일하신 ‘엘로힘’이 계시고, 이 땅에 유일한 거룩한 건축물인 성전이 있었고, 이제 유일한 구원의 길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며,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인 교회가 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엡 1:23)’고 또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엡 3:10)’ 하는 유일한 곳이다. 하늘들과 여러 하늘들의 하늘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지혜를 특히 하늘의 정사와 권세 즉 원수 마귀에게 보여주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실재가 오늘 교회에 있나. 하늘들과 여러 하늘들의 하늘들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만나고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를 통해 각 지체인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나타나고 있는가? 이러한 만남과 누림이 없다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능력이 적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를 누리는 은혜가 없다면 내가 신자가 아니거나 교회가 교회가 아닌 것이다.
주여 우리 공동체를 주의 교회 되게 하소서. 주께서 들으시는 교회 생활이 우리에게 있게 하시고, 종교 생활을 그치게 하소서. ‘우리 교회’ ‘나의 바람과 생각’ 안에 하나님을 가둬놓고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대로 주께 구하게 하시며 그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