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절을 보면 이 모든 놋 기물들이 ‘차진 흙에 그것들을 부어 내었더라’고 하며 그 제작 기법을 말한다. 놋으로 ‘부어 만드는’ 기법은 3천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옛날 신라시대 때 에밀레 종을 만들던 기법도 동일하며 그것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건축물의 큰 철제 구조물을 만드는 기법은 따로 있겠지만, 지금도 이 정도 규모의 두 기둥과 저수 탱크 (바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을 ‘부어’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히람의 사역은 가히 당시의 하이테크 사업이었고 이스라엘 범국가적 사업이었다.
부어지기 위해서는 녹아야 한다.
작은 사이즈의 금속품들을 서로 붙여서 큰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안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두 기둥과 저수 탱크 같이 큰 구조물을 ‘부어 만드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놋을 녹여야 하기 때문에 불을 잘 써야하고, 단번에 부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 만한 양의 뜨거운 놋을 붓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쉬이 식어 버리기 때문에 금방 끝나 버리는 각 과정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가득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곧 식어버렸을 때도 또 얼마나 많았나. 식기 전에 그 형틀에 부어져야 한다. 새로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기 위해 나는 먼저 녹아야 하고 단번에 그의 형상 안으로 부어져야 한다.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지체하면 지체할 수록 기형이 나오기 쉽다. 그러면 버려지거나 아니면 다시 불을 통과함으로 또 다시 녹아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다시 불을 계속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 주께서 나에게 새로 주신 ‘빛난 놋’의 정체성이 영광을 발하게 된다. 비로서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
은혜의 바다
‘molten sea’ 즉 ‘금속을 부어서 만든 바다’ 라는 뜻의 저수 탱크는 그 큰 사이즈 때문에 ‘바다’라고 불린다. 이 저수 탱크에 물을 저장해 놓고 필요에 따라 10개의 물두멍에 나눠썼다. 출애굽 당시 광야를 해매던 때의 이동식 성막에는 이렇게 큰 사이즈를 가지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세수대야 같은 물두멍만 있었지만, 이제 고정된 건축물인 성전이 완성되자 무한한 공급이 가능한 저수 탱크가 만들어 지게 된다. 성전을 묘사한 많은 그림 가운데 어떤 그림은 이 저수 탱크에 수로가 연결된 것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물론 성전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물을 끌어오기는 힘들었겠지만 재미있는 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은 생명이고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가 바다처럼 한이 없고 그 공급이 끊임이 없다. 이 세상에 살면서 더러워질 수 밖에 없는 손과 발을 어느 때고 씻어서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있다. 주님의 은혜는 나의 죄와 허물 보다 더 크다. 내 죄가 내 코에까지 쌓여 있다면 주의 은혜는 나의 머리와 온 몸을 덮는다. 그리고 그 은혜는 바다임을 깨닫는다.
소 열 두 마리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출 20:4)’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성전 마당에 소를 열 두 마리나 부어 만들고 저수 탱크를 받치게 한 것에 대해 오늘 해설 말씀처럼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에스라8:35에서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지파 수대로 드린 번제 소 열 두 마리에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 보다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화했던 소의 형상을 굳이 열 둘이나 만들어서 놓은 것은 아마도 우상을 조롱하기 위해서라는 느낌이다. ‘너희들이 전에 섬겼던 이 소들의 형상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떠 받치기 위해서나 쓰이는 들러리들이다. 그것도 열 두 마리나 이렇게 하고 있지만 정작 성전 안이 아니라 뜰에 이렇게 있다. 보이는 이런 형상은 무시하라. 보이지 않으시지만 야긴와 보아스 두 기둥과 문을 지나 성소와 지성소의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소 열 두 마리는 무시해야 한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 같아 보이는 열 두 가지의 것 들이 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가 ‘팔방’으로 나타나는 단 하나 ‘아가파오’ 이듯이 역시 이 열 두가지의 우상은 단 하나인 나의 ‘자아’에서 나타나는 것들 임을 본다. 이러한 열 두가지의 것들은 ‘은혜의 바다’를 잘 받쳐주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내 자아가 죽어 결박되지 않고 그 자리를 뛰쳐 나오면 은혜의 바다는 무너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한이 없지만, 내가 그 밑에 순복함으로 묶여 있지 않으면 그 은혜의 바다도 ‘깨빡’쳐 질 수 있다.
주님, 뜨겁다가 식다가를 반복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또 그 무한한 은혜를 믿고 내 맘대로 살다 깨빡쳐진 때도 얼마나 많았는지요. 하지만 주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으시고 다시 그 밑으로 들어가면 그 공급이 무한함을 또 경험합니다. 나의 모든 십이방의 삶의 모습이 주의 은혜 아래 있게 하소서. 은혜로 충만해서 나의 삶이 변화하고 주의 영광으로 비추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