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잠언을 끝내지 않고 빌립보서로 왔네.. (개인적으로 좀 다행인 것 같다는. ㅎㅎ)
전에 에베소서에서는 수신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었는데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이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가 더 크고 체계가 잡혀있던 것 같다. 성도들과 더불어 감독의 일을 하는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 모두 복수이다. 규모가 있는 교회, 성회, 회중 에클레시아이다.
2절은 에베소서의 문안과 완전 동일하다. ‘은혜가 너희에게,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평강이 (있기를)’ 나에게도 오늘 이 아침에 은혜와 평강이!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해 아주 좋은 기분이었나보다.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그 이유가 5절에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어로는 ‘그 복음 안으로 너희의 코이노니아’이다. 즉 이 ‘참여’라는 말은 성도의 교제라는 뜻이다. 그래서 교제는 적극적인 참여다. ‘교회 일’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그 복음 안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이 ‘시작했다’라는 단어enarxamenos에 대해 두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이 단어가 en과 archomai의 합성어인데, 뒤 아르코마이 단어 자체만으로도 시작이라는 뜻인데 굳이 ‘엔’이라는 단어를 붙여놓았다. 동일한 단어는 갈 3:3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한 구절에서만 쓰였다. 또 하나는 동사가 또 아오리스트다. 시제가 불분명하다. 현재 완료도 아니고 과거 완료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이 선한 일의 시작이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 것임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보통 전도를 받아서 소위 ‘영접기도’를 하면 그 때가 구원받은 날이라고 여긴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그 훨씬 이전일 수 있다. 아니, 사실 엡 1:4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한다. 어제 주님을 영접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 그가 나보다 인간성이 좋을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선한 일이 나보다 더 빨리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 ‘교제’안에서 힘써 섬길 뿐이다.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분명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확신’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배교를 보아온 바울이 이렇게 ‘확신’한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을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이요 시야다. 창세전에 택함 받고 구원받는 일 역시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나의 확신'은 내 믿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다. 나 역시 베드로 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도 있고, 배교할 수도 있는 믿지 못할 연약한 존재지만, 그렇기에 온전히 구원하시는 주님을 의지할 뿐이다.
1절에 자신과 디모데를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고 소개한 바울은 7절에 다시 ‘코이노니아’의 변형인 ‘함께 참예함’을 말하며 자신과 디모데만 특별한 사역자들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 모두가 사역 안에서 함께 참여함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영향력을 알고 있음에도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빌립보 성도들을 무척이나 사모(갈망)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서 한다. 이 ‘심장’이라는 단어는 사실 ‘심복 (빌레몬 1:7, 12, 20)’이라는 뜻으로 ‘창자’ 혹은 ‘배’라는 뜻이다. 우리 말, 특히 이순신 장군 한산도가의 ‘애를 끊다’ 에서 이 ‘애’와 같은 말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정말 아끼는, 또 그 사람과 동일하게 라는 뜻이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자를 가지고, 그와 동일하게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랑이 깊었다. 어떻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사모가 이렇게 클 수 있었을까?
아마도 기도를 통해 그랬던 것 같다. 바울의 기도는 에베소서와 비슷한 면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각 지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성장하는 면이 있지만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다시 에베소서 말씀처럼 공급이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즉 ‘너희 아가페가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서 더욱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기도하는데, 이 ‘풍성하게 하사’는 필요 이상으로 흘러 넘치게 주신다는 말이다. 받은 것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려는 것은 종교이고 고역이며 무리하는 것이지만, 내가 쓰고 다 쓰지 못해서 나누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은 공급없이 일을 시키는 분이 아니시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마 25:26)’ 분이 아니시다. 먼저 그의 아들을 주시고, 성령으로 풍성히 주시는 분이시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고 구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오늘도 나에게 있고 주님의 교회 안으로 공급함이 있다.
주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각 지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힘과 전략과 노력으로는 너무 빠듯하고 피곤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다시 사모하게 하소서. 그 흘러 넘치는 은혜로 나를 채우고, 주위를 적시고 온 땅을 적시게 하소서. 나에 속한 것은 전혀 필요 없음을 다시 배웁니다. 오로지 주님의 심복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