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며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계시를 나눈 바울은 오늘 말씀으로 각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씀한다.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그냥 무작정 순종이 아니라 ‘주 안에서’, 즉 주 안이기 때문에 순종하라고 한다.  이것은 부모가 항상 옳거나 선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주 안에 있다면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한다.  한자적인 의미로 복종은 옷 복에 좇을 종을 쓰고 순종은 순할 순 좇을 종이다.  복종의 복은 옷도 의미하지만 일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옛날에는 하는 일에 따라 입는 옷이 달랐기에 그랬나 보다.  아무튼 모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어제 말씀의 ‘복종’은 ὑποτάσσω 후포타쏘, 오늘 말씀의 ‘순종’은 ὑπακούω 후파쿠오 인데, 모두 ‘후포’라는 말이 앞에 있다.  ‘후포’는 ‘옆에’ 혹은 ‘밑에’ 라는 뜻으로 순종 혹은 복종의 의미는 먼저 위치적인 문제이다.  항상 옆에 붙어 있어서 경청하거나 혹은 밑에서 섬기는 것이다.  복종의 뒷부분 ‘타쏘’는 ‘질서를 따르다, 위치를 잡다’는 뜻으로 계속해서 위치를 뜻한다.  어제 24절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과 또 약 4:7에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도 후포타쏘가 쓰였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후파쿠오의 뒷부분 ‘아쿠오’는 ‘듣다’는 뜻이다.  즉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선 들어야 한다. 더우기 옆에 혹은 밑에서 들어야 한다.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는데, ‘옳다’는 뜻은 ‘의롭다, 정의롭다, 맞다’ 라는 뜻이다.  로마서에 많이 나오는 단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이제는 ‘옳다’는 개념이 너무 상대적인 개념이 되었다.  미국 학교에서는 더이상 ‘도덕’을 가르치지 않는다.  특히 여러 민족과 문화가 더불어 살다보니 그 차이점으로 인해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쪽으로 많이 가는 정책을 펴게 되지만, 믿는 자들의 가정만큼은 무엇이 ‘옳은’ 지 가르쳐야 한다.  스트레스 받고 좌절을 경험할지라도 세상적인 것들과 싸워야 한다.  물론 지혜를 가지고..

그런데 바울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첫계명이라고 한다.  십계명에서 다섯번째 계명인데, 다시 잘 읽어보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임을 알 수 있다.  십계명 중 모든 것이 그냥 일방적인 명령이지만, 희한하게 출 20:12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고 약속의 말씀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는데, 신명기 5:16에는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분이 있다.  바울은 아마도 출애굽기 구절과 신명기 구절을 모두 말씀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냥 일방적인 계명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장수와 복에 대한 약속이 있는 계명이다.  그러고 보면 그 때도 아마 아이들이 죽어라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나보다. ㅋㅋ 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텐데…

이어서 아비들에게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 ‘노엽다’의 단어는 4장 26절 ‘분노’와 같은 단어이다.  즉 우리 어른들도 분노 거리들이 있고 스트레스 받는 것들이 있지만, 아이들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그 원인 제공을 아비들이 많이 한다.  나의 세대와 비교해 보니 요즘 아이들 너무 생각이 없고 재미있는 것만 좋아하고 책임을 지려 하는 등 너무 한심해 보일 때가 많다.  게임으로 시간도 허송하고 세상 음악만 좋아하고… 하지만 이런 행태들에 대해 ‘나의 세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한다.  지금 세대나 나의 세대가 어떻든 변함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계하고 양육해야 한다.  ‘양육’이라는 말은 ‘영양을 공급하다, 장성하게 하다’이고 ‘교훈’은 ‘목적이 있는 교육과 훈련’이다.  ‘훈계’는 ‘경고 혹은 권유’라는 뜻이다.  아이들 맘 상한다고 기 죽는다고 가르칠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부모를 거역하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의 기준이 아니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약하고 실패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해시키고 오직 주만 온전하고 절대적인 분이심을 가르치는 것이 무한한 공급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로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고 장성케 하는 것이다.

종과 상전, 요즘으로 말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과의 관계에서 상전에 대한 순종 (앞의 ‘듣는’ 순종)을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한다.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상전 역시 하늘의 상전이 계시고 그를 두려워함으로 바르게 종들을 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나 상전이나 차이가 없다.  단지 이 세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서를 위해서 잠시 그러한 상하 관계가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주님, 이것이 옳은 것인줄 알면서도 삶에서는 피하거나 숨거나 무시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먼저 주의 말씀으로 바르게 교훈과 훈계로 양육됨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겠고, 나의 육과 욕심이 십자가 밑에서 튀쳐 나와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천명의 나이가 가까운데 저 개인의 문제도 버겁네요.  주님 도우시고 주님의 말씀과 생명으로 살리시고 공급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