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읽으며 과연 이 말씀이 현대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단순화되어 가문에 대한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고 더우기 현대화 및 세계화 영향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이 희석 되어 온지도 이젠 오래다.  맞벌이 부부도 많이 생기고, 어떤 경우에는 아내가 오히려 더 많은 수입이 있어서 남자 주부들도 생기는 현실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과연 가정 안에서 복종이 수입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가 생각해 볼 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물론 가장은 가정을 잘 이끌어갈 수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남편이 돈을 벌어 오기 때문에 아내가 복종 한다면, 아내가 수입이 더 많을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 바울은 결혼 생활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즉 세상에서는 수입에 의해 복종의 여부가 결정날 수 있을지라도 믿음의 부부 관계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교회이기 때문에 복종과 사랑의 문제는 수입과는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제 말씀 21절에서 ‘서로 복종하라’는 동사는 복수 남성격이다.  즉 이 명령의 대상은 우선 남성들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 22절에서는 여자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아마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았나보다. ㅎㅎ 그런데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 과연 현실적일까?  물론 주께 별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대로 복종하지 않겠지만, 분명 그 뜻은 절대 복종을 의미한다.  과연 이게 가당키나 한가?  단지 남편이기에 절대 복종하라고?  그에 대한 답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복종의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씀하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이기에 교회는 복종한다고 설명한다.  머리에서 명하는 모든 것은 몸이 복종하게 되어있다.  오늘 해설을 보니 이 ‘머리됨’이 폭군이나 독재자와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을 읽으며 ‘복종’의 개념에서 머리는 ‘너 이거 해!’ 같은 명령 복종의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밑으로 들어가다, 밑에 두다'의 뜻이다.  즉 남편을 먼저 세우고 그 권위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사실 머리는 몸을 끔찍이 생각한다.  새끼 손가락 하나 조금 베어도 머리는 꽤 신경을 쓰게 된다.  위가 쓰리면 위만 아프면 되는데 사실 머리도 아프다.  그래서 머리는 손으로 배를 쓰다듬게 한다.  아내가 아파할 때 머리로서 남편은 명령을 해서 ‘병원에 가!’ 라고 하기 전에 왜 아픈지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머리로서의 우선적 반응이고 정상적 기능이다.  큐티를 하면서 이렇게 깨닫게 되고, 또 글을 쓰면서 보니 정말 내 아내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일들이 너무도 많이 생각난다.  

이러한 원리는 23절에서 더 분명해 지는데 그리스도가 바로 ‘몸의 구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머리는 몸을 구해주고 항상 사랑한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아내를 항상 구해주고 사랑해야 머리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24절에 우리 말이나 영어 번역에도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지만 원어는 ‘그러나’이다.  왜 ‘그러므로’ 라는 단어 대신 ‘그러나’를 썼을까?  내용을 보면 당연히 ‘그러므로’가 더 자연스럽다.  문장을 읽어보니 바울은 지금 부부 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고 있고, 사실 바울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부부 관계 보다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나’를 써서 관심이 부부 문제에만 가지 않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가치인 그리스도와 교회를 부각시키기 원하는 것이다.

아내들에게 먼저 복종하라고 한 후 남편들에게 사랑하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아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며 복종해고 그때서야 사랑스러워 남편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나만 그랬나? ㅎㅎ) 문장을 다시 잘 읽어보면 그 사랑의 모습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한다.  이 ‘사랑’은 물론 아가페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먼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으로, 남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 먼저하는 사랑을 사실 요구한다.  아, 남편되는 거 쉽지 않다… 그냥 복종하고 말지.. ㅋ  하지만 항상 내가 하려고 하면 실패고 불가능이다.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하자.  아자 아자!

26절도 계속해서 부부 관계를 말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진짜 주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씻으시는데, 레마의 말씀의 물의 씻음으로 하신다.  이것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화시키시는 과정이다.  여기 ‘거룩하게 하다’ 또’씻다’에 쓰인 동사는 헬라어에서 특이한 동사인 aorist형인데, 시제를 많이 쓰는 다른 동사와 달리 그냥 그 사건을 서술하는 동사이다.  즉 그냥 그렇다, 그것이 진리다,  그렇게 된다 라는 뜻인데, 같은 동사가 27절에 ‘세우다’ 그리고 ‘흠이 없게하다’ 에도 쓰였다.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씻으시고, 영화롭게 세우시고, 흠이 없게 하시는 모든 것이 과거의 일도 현재의 일도 미래의 일도 아닌 시간을 초월한 진리이다.  이미 교회는 그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영화롭고, 동시에 미래에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리를 바탕으로 남편들도 역시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하 구절 다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를 말하며, 부부 관계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다시 그의 몸의 지체임을 설명한다.  우리 말 번역에서는 그냥 ‘몸’만 나오지만 원어에서는 ‘그의 몸이요, 그의 살이요, 그의 뼈다’라고 되어 있다.  아담이 여러 동물의 이름을 지을 때 그 특징들을 살려서 지었겠지만, 자신과 같은 부류는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대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어 그 앞에 데려오시자 비로서 그는 여자를 ‘내 살 중의 살, 내 뼈 중의 뼈’라고 즉시 불렀고 이름을 ‘여자’ 즉 ‘남자로 부터 나온 이’ 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와 교회다.

남자가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는데,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임을 말씀한다.  고전 6:17에서 바울은 음행의 문제를 말하며 창기와 합하는 자가 한 육체가 되듯,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하며, 각 개인이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고,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임을 말씀한다.  아… 이 말씀은 나를 흥분케 한다.  밖에 ‘교회’라는 간판 달은 곳들은 많은 문제를 보이고 있지만, 주께서 몸으로 삼으신 우주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결코 분리되거나 다르지 않은 하나이다!! 

바울은 ‘내가 지금 남편과 아내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정말 내가 얘기하는 것은 이 큰 비밀인 그리스도와 교회다!!’ 라고 외치는 것 같다.  여기서 바울은 신기하게도 다시 eis라는 단어를 쓴다.  단지 ‘그리스도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와 ‘교회 안으로’를 말하고 있다 라고 한다.  

33절에서 바울은 앞절에서 이렇게 큰 비밀을 말했지만 아무튼 다시 부부 문제로 돌아와서는 현실 안에서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라고 한다.  여기는 남편이 먼저다.

주님, 그냥 둘이 만나서 지지고 볶고 살다 인생 마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을 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보게 하소서.  교회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러운 신부임을 믿고 주께서 세우시는 그 세움으로 서로를 세우게 하소서.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