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 딤후 3:4)

나이 열 두 살에 왕이 됐던 므낫세가 뭘 알았을까?  아마도 어머니의 섭정이나 신하들의 간계가 있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만약 신하들의 간계라면 히스기야 수하 신하들은 히스기야 생전에는 그의 권위에 굴복해서 여호와를 따랐지만 그 속내는 여호와를 따르는 것 보다는 자기들의 소견을 피력하기 원했거나 또 여호와 보다는 쾌락을 더 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나이 어린 아이가 왕이 되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제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다’ 라고 우상 숭배를 부추겼는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헵시바 즉 ‘즐겁다 기쁘다’ 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므낫세의 어미가 실은 이름만 그렇지 즐거움이나 기쁨을 넘어선 ‘쾌락’을 추구했던 여인이었을지 모른다.  ‘즐거움과 기쁨’을 잘못 이해하면 ‘재미’와 ‘쾌락’이 되어 버린다.  아무튼 이 이름이 이사야에만 한 번 더 나오고 구약에는 나오지 않으니 므낫세 어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상 숭배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항상 쾌락, 특히 성적 쾌락과,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려는 여러 모양의 오락 행위와 연결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결국 사회 전체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버린 인생은 외롭고 심심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더 자극적이고 더 재미있는 것들을 추구한다.  하나님 아닌 것에 ‘항상 그리고 계속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올인하여 추구한다.

이렇게 타락한 문화는 하나님께서 그 정도를 측정하시는데, 건축자들이 사용하는 줄과 추를 가지고 그 악함을 재신다.  그리고 마치 잘 못 만들어진 건물을 허는 것 처럼 뒤엎어 버리신다.  13절에는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라고 말씀하는데, 이 ‘씻다’는 단어는 영어로 clean보다 더 강한 wipe 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즉 깨끗하게 씻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애버릴 정도의 강한 표현이다.  더구나 14절에는 이제까지 ‘남은 자들’을 항상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이번 만큼은 아예 남은 자들 조차 버리신다고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신다.  유다에게는 심판이지만 이 시대에는 말세에 대한 경고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움을 아예 추구하지 말아야 할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욥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욥은 당시 최대 갑부였고 그에 따라 많은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었고 그의 자녀들 생일 때 마다 크게 잔치를 베풀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잔치 바로 후에 그는 자녀들 명수대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즐거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 예를 들어 스포츠, 놀이 동산 방문, 영화나 드라마 관람 등 여러가지 오락 거리에 대해 아예 반대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달콤한 것들에 대해 너무 빠져들지 말고 곧 주님 앞에 다 태워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주 안에 있는 나를 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릇을 ‘씻어 엎음’은 있지만 그릇을 아예 깨버리지는 않으신다.  주님은 목적없이 온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분명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완성될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이룰 것이다.

주님, 오늘 여러 가지 fun과 excitement를 내 마음을 자연히 추구하게 될 것이지만 그 가운데 믿음을 팔아 먹지 않게 하시고, 절제하며 근신하며 순간 순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 그리고 쾌락의 즐거움을 주의 제단에 다 태워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