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는 ‘정의’ 혹은 ‘의’를 뜻하는 단어가 둘 있는데 바로 위의 justice 혹은 righteousness이다. 보통 justice가 ‘공평성’ 혹은 ‘사회정의’를 뜻하는 반면 righteousness 는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의’를 뜻한다. 그래서 법정이나 학교에서는 righteousness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 도덕적 혹은 종교적으로는 그 누구도 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19절에는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마태는 밝히는데, 이 ‘의롭다’라는 헬라어는 ‘디카이오스’로 성경 전체에 나오는 단어지만 특히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단어로 영어 번역에서는 어떤 부분에서는 just 로 또 다른 부분에서는 righteous로 번역했다. 즉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는 헬라어가 오히려 justice와 righteousness 에 대해서는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디카이오스’ 라는 단어는 법 즉 ‘율법’과 관련된 단어인데,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율법적으로 의로운 것은 요 8:5 처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는 것이었다. 그래야 백성 중에 본이 되어 죄가 끊어지리라 하신 말씀이 있다 (신 22:21).
그런데 ‘의로운’ 요셉은 그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끊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의로움을 보여주었다고 마태는 밝힌다. 여기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의’를 엿볼 수 있다. 가장 하급 ‘의’는 세상 법을 준수하는 것이고, 그 위에 종교적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있고, 가장 고상한 의는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에 속한 것 즉 복음이다. 그래서 진정한 의는 율법을 초월한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는 물론 마태 복음에서도 이미 보여주고 있고, 후에 산상 수훈에서 나오는 천국 복음의 핵심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세상 법이나 율법은 기본이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고상하고, 실제적으로 지키기 불가능한 성령의 법이 주어졌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고 또 위로 입히셔야 하나님의 요구와 기준을 이룰 수 있다. 오늘도 나는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공평성과 정의로움을 내세우지만 결국 나 역시 공평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않다. 이는 결국 하나님 앞에 의롭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 마태가 요셉에 대해 밝힘으로 주님의 요구가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높은 것임을 다시 한번 인식합니다. 여러 문제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답답하고 화날 때가 많지만 결국 주님 앞에 겸손하게 돌아옵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