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죄도 살아 있어서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거짓말이 계속 거짓말을 낳는 것 처럼 죄는 성장하고 또 새끼를 친다.  마누라 이세벨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던 것 처럼 보이는 아합에게 왕자만 70이나 된다.  이들과 더불어 아합과 관계 있는 이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야고보서 1:15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말씀하는데, ‘욕심’이라는 단어 ‘에피뚜미아’는 ‘간절히 바람, 갈망, 욕정, 금지된 어떤 것을 갈구함’ 등의 뜻이다.  뒷부분 ‘뚜미아’는 ‘열정, 화, 진노, 뜨거움, 끓음’ 등의 뜻이 있는데, 이 말은 세상 살이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살아가는 것이 재미있거나 혹은 재미없어 보여도 ‘뚜미아’로 가득하고 ‘뚜미아’를 갈망한다.  차가운 아이스크림를 선전하는 광고에도 벗은 여자들이 나와서 요염하고 ‘핫’하게 먹어야 잘 팔린다.

재미있는 것은 ‘죄’라는 단어가 단수이다.  보통 단수의 ‘죄’가 복수의 ‘죄들’을 낳게 되는, 쉽게 말해 ‘원죄’가 ‘자범죄’를 이끌어 내는데 (요즘은 이런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즉 로마서 1장에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죄들은 결국 원천적인 단수의 ‘죄’로부터 발생하는 것인데, 이러한 ‘원죄’ 즉 단수의 죄의 원인이 ‘욕심 에피뚜미아’임을 야고보는 설명한다.  흠.. 그런데 욕심 자체도 결과로 나타나는 ‘죄들’ 중 하나가 아니었나? 

그런데 롬 1:24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라고 말하며 ‘정욕’ 즉 ‘에피뚜미아’ 라는 단어를 여기서도 사용한다.  그리고 마치 이 ‘에피뚜미아’가 윗 구절들의 원인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동성욕을 언급한다.  그래서 동성욕은 도덕적 사회적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문제임을 본다.

아무튼 다시 생각해 보니 ‘원죄’의 문제가 ‘에피뚜미아’임이 밝혀진다.  이 욕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리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사탄이 그랬고 아담의 타락이 그랬다.  마찬가지로 아합도 그의 집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는 왕의 모습을 떠나 자신이 신이 되는 자리 즉 뜨거운 욕심으로 인해 심판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고 순종함을 배우심을 통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 (빌 2:8)’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 (히 12:2)’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은 내가 신이 되겠다는 욕심과 교만이 아니라 고난과 순종을 통해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가능한 것임을 주님은 보여주신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라야 가능하다.

받은 복을 세어보기 위해선 먼저 죄가 얼마나 성장했고 새끼를 쳤는지 보는 것도 필요하다.  보통 ‘회개 기도’를 드리려고 아직 자백하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내 죄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너무도 많아서 이걸 어떻게 다 고백하나 좌절할 때가 있다.  하지만 주님께 나아가 내가 자백하고 돌아설 죄들에 대해 물을 때 주님께서는 그 때 나에게 필요한 자백을 생각나게 하신다.  자백하면서 내가 받고 누리는 복도 생각나게 하시는데, 내가 받은 가장 귀한 복은 나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다.  아합의 아들들은 멸망당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환란을 당해도 맏아들 맏형이신 주님과 같이 영화롭게 하셨다.

주님, 나의 눈은 항상 세상의 화려함과 욕심을 좇습니다.  나의 눈을 돌이켜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에 매혹되게 하소서.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해야만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찬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