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는 사랑의 모습이 있고 자비의 모습이 있다.  원래 용서는 잘못한 이가 먼저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찾아와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는 것은 자비이지만, 찾아와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먼저 용서하고 다가서는 것은 사랑이다.   
오늘 말씀은 흡사 계시록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므깃도라는 지명하며, 시신을 찾기 힘든 이세벨의 멸망, 치장한 음녀 등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본다.  이세벨의 위세등등하던 모습은 능력이 적은 양무리에게는 아무리 보아도 근접할 수 없는 막강한 음녀의 모습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예후, ‘여호와는 그다 Jehovah is He’가 모두 깨끗하게 정리를 한다.  마치 계시록 19:17에 나오는 ‘한 천사’를 보는 듯 하다.

이세벨은 죽을 때까지도 회개하지 않고 예후에게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고 말하며 조소하고 비꼬며 죄책감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예후의 참 주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왕위를 옮기실 때 그 주권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세벨에게는 예후의 모습이 반란이요 반역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온전한 순종이다.

종교적 입장이 아닌 우리의 문화적 시각으로는 예후의 이같은 거사가 역성혁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현존하는 왕이나 지도자가 하늘과 백성의 뜻을 버리고 악정을 행할 때 명분과 자격이 있는 다른 이가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정을 세우는 것이 역성혁명이지만, 예후의 예가 역성혁명이 될 수 없는 것은 그에게는 전혀 혁명을 일으키거나 왕조를 뒤엎을 계획이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성혁명은 많은 경우 당사자가 아닌 주위 사람들이 부추김으로 되기도 하지만 예후는 부추김이 아니라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받은 확실한 소명과 명분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예후가 이세벨을 친히 던지지 않고 먼저 내시들로 하여금 던져지게 하고 후에 밟았던 것이다.  일에는 순서가 있음을 보여준다.  왕의 딸로 예우하기 위해 시체를 찾았지만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된 것을 보며 여호와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을 외치고 원하는 이들로 인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마틴루터도 정작 본인은 계속 천주교에 남아 있기를 원했고, 요한웨슬레 역시 성공회에 남아있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이다.  

주님, 많은 이들이 개혁을 외치지만 계시록에는 주님 오실 때까지 여러 모습의 교회가 존재함을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하나이고 주인도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서로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예후가 되어 도전을 주고 계속 더욱 주님의 생명으로 새로워지는 교회의 모습이 되게 하소서.  우상 숭배와 분열을 따르는 이세벨은 결국 형체도 없이 심판 받음을 봅니다.  근접할 수 없어 보이는 막강한 것들도 주님 앞에서는 지극히 가련하고 약한 존재임을 알고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갖게 하소서.